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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웃음

반뼘소설

by 북남북녀

가족이라고 하나 그라고 칭하는 것은 내가 그를 기억하는 순간이 두 번 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있는 그 사건이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그저 어린아이의 환영일 뿐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럼에도 내 가장 오래된 기억이며 최초의 기억인 그 순간에 대해 말해 보려 한다.


민들레 홀씨가 바람에 흩어지며 떠다니는 날, 따뜻한 기온으로 녹아내린 푸근한 흙냄새가 공기 중에 배어있다. 한적한 시골 마을의 주택, 마당 구석에는 나무로 만든 평상이 하나 보인다. 평상 위에는 열여덟 살인 그와 네 살인 내가 거리를 두고 앉아 있다. 평상 중앙에 내가 앉아 있다면 그는 평상 끄트머리에 엉덩이만 걸치고 앉아 다리를 꼰 상태다. 은색 면도칼을 든 그가 씨익 웃는다. 씨익 웃는 그가 자신의 팔 안쪽 흰 살결 부위에 면도칼을 대고 죽 긋는다. 면도칼을 따라 그어지는 검붉은 선. 길게 그어진 자신의 상처를 살피다가 그는 다시 나를 보며 웃는다. 별거 없네,라는 그런 웃음. 씨익. 그가 고함을 지른다. 나는 그의 고함소리를 알아듣지 못한다. 별안간 그의 얼굴이 험하게 일그러진다. 그가 다시 한번 고함을 지른다. 벌컥 문을 열고 흰 원피스를 입은 마른 여자가 갈색 긴 머리를 휘날리며 뛰어온다. 여자는 가만히 서서 검붉어진 그의 팔을 바라본다. 여자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눈자위는 붉어진다. 오른쪽 다리를 위로 올려 꼰 자세로 앉아 여자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힘이 잔뜩 들어간다. 그가 웃는다. 별거 아니야, 라는 그런 웃음. 씨익.한쪽 입꼬리만 올리고서.


이후로 나는 그를 본 기억이 없다. 가족들 몰래 집문서를 들고나간 그가 세상을 떠돌고 있으며 흰 원피스 입은 마른 여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은 어느 사이에 내 머리에 저장됐다.


십수 년 후 아버지 장례식장에 그는 노년의 남자와 함께 나타났다. 스님 복장을 한 그들은 아버지 영정사진 앞에서 염불을 외우고 돈을 받아 들자 조용히 일어섰다. 장례식장 밖으로 나가는 그의 뒷모습은 아버지를 꼭 닮아있었다.


자신을 인식해가기 시작한 아이가 고함을 지르고 어깨를 들썩거리며 운다. 스스로의 비극에 빠진 아이의 울음을 어떤 말로도 멈추게 하지 못한다. 작은 무덤이라고 어둠이 덜한 것은 아닐 테니까. 아이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린다. 싫다고. 아이는 소리친다. 힘들면 힘들다고 하면 돼, 그래도 다 알아들어. 아이의 등을 쓰다듬는다. 아이가 사나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손을 치워낸다. 괜찮아, 그럴 수 있어. 괜찮으니까 아이의 등에 손을 올리고 속삭인다. 아이는 왈칵 울음을 터트린다. 아이의 몸이 서럽게 흔들린다.


그는 계모 손에 자랐고 이복동생들에 둘러싸여 있었으며 그의 외가는 계모와 그 사이를 이간질했다. 그의 친모는 물난리에 떠내려갔으며 함께 살던 할머니는 자신의 아들과 나이가 같은 그를 구박했다. 나이 어린 그의 아버지는 다른 가족들 건사에 바빠 그에게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라는 비극 속에서 그가 빠져나오지 못했을 거라는 것은 내 추정일 뿐이다. 그를 본 것은 두 번뿐이니까.


그의 나이와 내 나이가 바뀌어있는 평상을 꿈속에서 간혹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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