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한 대학 옆 공원. 물오른 가지에 맺혀 있는 초록 순과 보드라운 질감의 흙냄새, 얼굴에 닿는 공기의 포근함은 어제 까지 가지고 있던 면접에 대한 부담을 대기 속으로 실어갔다.
면접 시간은 열한 시였다. 집에서 지하철로 한 시간 반 거리 대학에 입시 원서를 넣었다. 시험 성적은 형편없었고 점수에 맞는 학교를 찾다가 발견한 대학이었다. 자취하며 학교를 다니는 대학생들의 불미스러운 사고가 연일 보도되고 ‘누가, 누가 어떻게 됐다더라’라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빈번하게 들리던 무렵이었다. 사건, 사고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던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집에서 통학할 거리에 있는 학교를 가야만 했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라도 통학하지 못할 거리는 불가능했다.
복도에 들어서자 익숙하게 들어왔던 찬양 소리가 기타 반주와 함께 들려왔다. 면접을 도와주러 온 재학생들이 한 곳에 모여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한 학생이 미소 띤 얼굴로 번호가 적힌 종이를 내게 내밀었다. 하얀색으로 칠해진 벽, 매끈한 바닥, 밖으로 연결된 창에서 보이는 푸른 하늘. 이곳은 나를 받아들이고 있다, 교수들과의 면접을 기다리며 생각했다.
네다섯 명의 교수가 창 밑 테이블에 일렬로 앉아 있다. 그보다 조금 떨어진, 창을 마주 보는 자리에 나는 혼자 앉았다. 잎이 돋아나지 않은 나뭇가지가 하늘로 뻗은 모습이 창밖으로 보였다. 순간 가지가 사람의 손처럼 보였다. 하늘로 손을 뻗는 가지라니. 그 가지가 내게 전하는 신비한 메시지를 품은 것처럼 보였다. ‘내게 강 같은 평화’ 혹은 ‘말할 수 없어서 비밀이 되어버리는 그 이름’ 같은 가사가 가지에 걸려 진동했다. 그 진동 안에 내가 속해있었다. 범접할 수 없는 평온이 흘러들었다. 누구도 뺏을 수 없는 보석이 내 안에서 반짝거렸다.
멀리서 오는 듯한 질문 하나가 내게 떨어졌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인정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하여, 말하다가 울컥했다. 그 공간에 있으면서 나는 또 다른 흐름에 감싸여 있었다. 두 공간에 내가 속해 있었다. 가슴이 빛으로 가득 차는 공간에서의 떨림이 음성으로 변환되었다. “아멘”이라고 내 대답에 누군가 화답했다. '이곳은 분명 내가 와야 할 곳이다, 오게 될 것이다’라는 확신이 화살처럼 꽂혔다.
한 학기가 흐르고 다음 학기가 시작됐을 때 나는 수업을 빠지기 시작했다. 간단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에 오면 교수한테 전화가 왔었다고 엄마가 전해줬다. 식구들이 모두 잠든 밤, 변소가 있는 마당으로 나왔다. 엄마가 아빠를 위해 담근 인삼주를 넣은 주전자가 내 손에 들려 있었다. 마당 한편 먼지 가득한 의자 위에 앉아 컵에 술을 가득 따랐다. 독약이 이럴까 싶게 독한 향이 콧속으로 흘러들었다. 중간에 멈추면 다시 입에 대지 못할 것 같아 잔에 가득 든 술을 한 번에 목으로 쏟아부었다. 톡 쏘는 오물 냄새, 바스락대는 바퀴벌레, 갓난쟁이 울음 같은 고양이 소리. 고개가 뒤로 젖혀져 무심코 보게 된 탁하고 캄캄한 하늘. 비틀비틀 걸어 동생이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동생 옆에 누웠을 때 왈칵, 왈칵 목으로 많은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언니, 언니 부르는 소리. 다급한 듯 느껴지는 발소리 고함소리, 얼굴에 닿는 천의 차가움.
간단한 아르바이트를 가려고 일어나 집을 나서는 내게 식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교수의 전화는 더 이상 걸려 오지 않았고 화살 맞은 듯한 끌림을 느꼈던 곳으로 나는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