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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의 이유

토머스 드 퀸시 <어느 영국인 아편 중독자의 고백>

by 북남북녀
고통이 어떻게 누그러졌든 지나간 세월은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고통의 여러 모습들이다.

<어느 영국인 아편 중독자의 고백>76p


별거 아닐 수 있지만 데니스 존슨의 <기차의 꿈>을 읽으며 ‘어린아이 같은 면’이라는 구절에 궁금증이 일었다. 주인공 로버트 그레이니어를 서술하는 구절인데, 기억하지 못하는 사고로 어릴 적에 부모를 잃고 친척 집에서 성장하며 온갖 불행과 고통을 바라보는 로버트 그레이니어에게 아이 같은 장난스러운 면은 찾아볼 수 없었다. 느껴지는 분위기로는 차분하고 서정적인 인물이었다.


세상의 악의에 물들지 않는 주변인스러운 성격을 ‘어린아이 같은 면’이라 서술한 걸까, 라는 생각이 최근에 들었다. 소설 속에서 표현되는 초자연적 현상이(죽은 아내를 본다거나, 늑대 소녀를 본다거나 하는) 주인공의 이러한 아이 같은 면에서 연결되는 걸까 하고.


토머스 드 퀸시의 <어느 영국인 아편 중독자의 고백> 서문에 작가인 앨리시아 헤이터는 저자인 토머스 드 퀸시에 대해 “동시대인들에게 그는 모순으로 가득한 사람이었다. 여린 마음을 지녔지만 공포, 살인, 음모에 매료되었고, 말은 정중했지만 글은 때로 악의가 있어 무례하기까지 했으며, 겉으로는 성깔 있어 보였지만 마음은 매우 착했다.”라고 적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어린아이 같은 면’이 있는 사람이었네, 생각했다. 아이들은 때로 무례하지만, 다른 사람이 울면 함께 울음을 터트릴 정도로 착하고 마음은 한없이 여리지만 귀신, 유령 등의 무서운 이야기는 좋아한다.


저자가 아편을 처음 복용한 1804년은 아편이 금지된 마약이 아니라 약국에서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진통제로 광범위하게 쓰였다. 노동자 계층에서는 알코올보다 저렴한 아편을 힘겨운 노동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하는 시절이었다.


저자인 토머스 드 퀸시는 소년 시절에 기숙학교에서 나와 런던 거리에서 부랑자로 산 기간이 있었다. 그 시절의 후유증으로 참을 수 없는 위통에 시달렸고 대학 친구의 권유로 아편을 시작했다. 아편은 탁월한 진통 효과와 심리적 안정감뿐만이 아니라 꿈의 세계로 저자를 이끌었다.


자신의 행복뿐만이 아니라 타인의 행복까지도 바라는 다정한 몽상가이자 학자인 저자는 아편 복용 후 상실과 고통의 이미지 속에서 땀으로 뒤범벅된다. 이미지화된 상실과 고통에는 공포까지 더해진다. 신체는 허약해지고 일상생활을 지속하지 못하는 무기력함과 작업에 방해를 받는 혐오감은 아편의 부작용이었다. 단기간 아편을 끊거나 용량 줄이기를 반복하면서 저자는 고통의 수렁에 깊이 빠져든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는 어린 시절의 고통이 아편중독과 연결됐고, 아편 중독으로 꿈꾸기를 경험하면서 인간의 잠재의식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지금 시대는 ‘무의식’이나 인간의 잠재의식에 대해 일상적으로 듣게 되지만 이 책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보다 75년 빨랐다.)


“<고백>을 쓰게 된 목적은 ‘잠재적으로’ 인간의 꿈속에 있는 ‘광휘, 그 무엇’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소년 시절에 부랑자 생활을 하면서 저자가 경험한 거리는 자비롭지 않았다. ‘돌고 돌고, 꼬이고 꼬이는 복잡한 속임수'들이 있었고 ‘도로는 돌의 심장을 가진 계모였고, 아이들의 눈물을 마시는 거리’였다. 저자는 기아의 고통에 시달렸다.


저자의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면은 그러한 고통 중에서도 살기 위해 행하는 악에 물들지 않는다. 어머니에게 공감과 자비를 원하나 얻지 못하고 거리의 어린 매춘부 앤에게서 자비를 보게 됐으나 의도치 않게 헤어지며 평생 따라다니는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소설 <기차의 꿈>의 주인공 로버트 그레이니어도 그러했으나 <어느 영국인 아편 중독자의 고백>의 저자도 스스로 길을 찾는다. 다른 사람들이 걷는 길과는 다른 곳으로. 이들의 ‘어린아이 같은 면’은 살기 위해 행하는 악을 피하며 걷기에 많은 사람이 걷는 대로가 아니라 자신만의 길로 접어든다. 그 과정에서 잠재의식과 연결되는 초자연적 현상들을 경험하기도 한다.


상처가 깊고 예민하며 어린아이 같은 면이 두드러지는 이가 있다면 다정한 눈빛과 친절한 말로 품어주시기를. 공감 어린 한 단어만으로도 지옥에 있던 영혼은 천국으로 옮겨갈 수 있다.


어린아이 같은 사람은 아름답지만 연약하다. 재능이 있으나 충동적이다.(이 세상 모든 어린아이가 그러하듯이) 나이가 늘고 신체가 성장했다 하여 영혼까지 ‘어른’이라는 틀에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어머니를 포함한 후견인 어른들이 상실을 경험한 영리하고 민감한 소년에게 부드럽고 공감 어린 눈빛을 보였다면, 덜 엄격했다면 소년이 거리로 나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기아와 상실의 고통에 허덕이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아편이라는 수렁에서 헤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운명은 ‘어쩌면’을 허락하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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