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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면 바보

루시아 벌린 <청소부 매뉴얼>

by 북남북녀

“11월 12일. 바실은 이날만 되면 자기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생각하는 거야. ‘멀리, 오래전’ 음악이 전화 배경에 흐르고”


난 네 걱정 많이 했어. 특히 네가 병원에 들어가 있었을 때. 너는 좀 방황하는 생활을 했지...... 세 번 이혼에 자식이 넷, 직장도 여러 번 바꾸고 그런데 자식들은 뭐해? 아들들이 자랑스러워?”

샌드위치가 나왔는데도 나는 짜증이 났다.

바실, 어떻게 바다를 따분하다고 할 수 있어?

너는 따분한 게 없어?

없어. 정말로 난 따분했던 적이 없어.

하지만 따분하지 않은 대신 고생이 많았잖아.

칼로타, 이 친구야...... 그러다 지난날을 어떻게 주워 담으려고 그래?

말해봐, 너는 지금까지 인생에서 뭘 성취한 거 같아?


어긋나는 대화로 서로의 간극을 인식하면서 40년 만에 만난 동창 칼로타와 바실의 점심시간은 불유쾌하게 끝난다. 가족들이 바실과의 만남을 궁금해하자

“바실은 다시는 연락하지 않을 거야.” 칼로타는 운다.

바실과 칼로타는 결이라고 한다면 결이 다른 사람이다. 노후 대책이 뭐냐는 질문에, 아들들은 뭐 하냐는 질문에, 뭘 성취했냐는 질문에 칼로타는 대답할 수 없다. 칼로타는 좋은(좋다고 말해지는) 집을 사고 좋은 차를 타며 좋은 동네에 거주하는 바실의 성취와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는 바실의 자녀들 같은 조건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아니다.

바다를 따분해하는 그에게 놀라며 어떻게 바다를 따분해 할 수 있냐고 묻는 칼로타는 순간을 살아갈 뿐이다. 그녀의 바람은 해를 끼치지 않으며 그녀의 길을 가는 것이다. 알코올 중독으로 병원에 들어가 갱생 치료를 받고 싱글맘으로 아이 넷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도. 칼로타는 성취가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 중요한 사람이다. 그것이 세상과 불화하는 이유를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성취했냐는 질문에는 판단이 들어간다. ‘어떻게 주워 담으려고 그래’에는 비판이 담겨 있다. 타인의 성취에 대해서, 그 사람이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 그 자신이 아니고서야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타인의 민낯을 억지로 드러나게 하고 그가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 말하는 일은 서로에게 예의가 아닐 것이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른 타인의 말에 울면 바보인 이유다.

“난 지난날은 필요 없어. 그냥 해를 끼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가던 길을 갈 뿐이야.”





<청소부 매뉴얼>에 수록된 <울면 바보>라는 단편을 읽고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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