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나무 책상에 엎드려 울었다. 친한 친구들과 고등학교가 다르게 배정됐고 시끌벅적한 교실에서 부재의 슬픔을 미리 경험하고 있었다. 세워지면 부서지고 만나면 어느 때인가는 분명 헤어진다. 그 순환의 고리가 마음에 새겨졌다. 패인 상처가 가득한 나무 책상에 엎드린 채로.
오십 세 까지만 살고 싶다, 고 막연히 생각했다. 오십 세면 어느 정도의 일은 모두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서서히 늙어가며 죽기를 기다리느니 반짝,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훅 스러지면 좋겠다고. 십 대의 허세일 수도 있겠으나, 그런 삶도 괜찮겠다고 아이를 낳기 전까지도 줄곧 생각해왔다.
만나고 헤어지고 변해가는 것들을 바라보는 것이 편안하지 않았다. 부서지는 잔해 속에 내 삶이 놓여 있는 듯싶었고, 그 잔해들 속에서 나오고 싶은 의지도, 힘도 없었다. 지표면에 닿으면 녹아내리는 눈처럼 형체도 없이 가볍게, 사라져 가고 싶었다. 애를 쓰기는 했으나 어떤 종류의 애정이 솟아오르기에 내 안에 웅크린 아이의 힘이 더 세게 느껴졌다.
아이들의 볼을 쓰다듬으며, 아이들이 스무 살 될 때까지는 살았으면 좋겠어. 이것은 최소한의 바람이고 오래오래 살아남아 아이들이 성장하고 변화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모습까지도 지켜보고 싶다.
헌신이나 희생보다는 선택에 가깝다. 아이들도 나로 인해 살겠으나, 나 역시 조금씩 조금씩 일으켜진다. 이런 게 관계가 아닐까. 나로 인하여 살 수는 없어도 타인으로 인하여 살 수는 있다. 비록 부서지는 잔해 속에 내가 여전히 웅크리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타인을 향해 가려고 종종 우리 자신을 가두는 고리를 깨뜨릴 때, 인생은 흥미진진해집니다.
나는 지옥이란 자기 자신이며 자신 속에 갇히는 것이고, 우리가 타인을 바라보고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날 천국이 열리고 시작된다고 절대적으로 확신합니다.
엠마뉘엘 수녀 <나는 100살,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자신을 해방시킨다는 것, 그것은 결국 자기 안에 있는, 타인과 관계 맺는 존재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사물과 타인과의 올바른 관계는 뇌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섬세한 끝에서 나온다.
우리가 같은 밧줄에 몸을 묶고 함께 걸어갈 때 우리의 몸은 튼튼해지고 영혼은 넓어진다. 자신이 예전에 알지 못하던 차원으로 성장했음을 느끼게 된다.
엠마뉘엘 수녀 <풍요로운 가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