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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는 것들

유미리 <세상의 균열과 혼의 공백>

by 북남북녀

미안하지만 다리가 길고 몸통이 손톱보다 작은 하얀색 거미를 샤워기로 하수구에 넣었다. 가는 다리로 거미는 버티는 듯했으나 곧 쓸려내려갔다. 하수구 속으로 들어간 거미는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으나 씻기를 마친 나는 욕실을 나왔다.


윤기 없이 뻣뻣하게 뭉친 털과 복부가 열려 고여있는 피. 뙤약볕 속에서 경직되어 누워있는 참새(눈은 뜬 채였나) 옆으로 살짝 비켜 길을 걷는다.


반짝이는 유리 티포트, 속이 환히 비치는 유리잔. 금색의 매끄러운 손잡이. 요즘 상품들은 예쁘게도 나오네, 천천히 발걸음을 돌린다.


세일가 7900원. 아이들 물놀이용 옷이 필요한데. 지금 당장 입을 옷이 없는 것도 아니고. 혼잡한 쇼핑몰을 빠져나간다.


정가 17000원에 판매가 14000원. 정가 18000원에 판매가 15000원. 화려한 표지의 중고 서점 책.

동네 헌책방에서는 책을 구경하고 있으면 주인아저씨가 자판기에서 밀크커피를 뽑아 줬었는데. 열어보지 못하도록 비닐로 덮인 책도 없었고. 한두 권은 계산도 하지 않고 덤이라고 했었지. 타닥타닥 내리는 비가 천장을 때리던 날, 누렇게 변색된 책 사이에서 마시던 자판기 커피.


정가 7500원에 판매가 3400원. 2002년 발행. <세상의 균열과 혼의 공백>

차례를 훑고 문장 한두 개를 읽는다. 동네 도서관 검색 시작. 미간에 주름을 잡고 몇 초.


유미리 에세이. 화 잘 내는 사람의 글, 분노로 쓴 글. 언젠가 읽어보리라던 오에 겐자부로의 책이 읽기 싫어졌다.




버지니아 울프, 유미리를 번갈아 읽는다.

공통점:여자라는 것, 밝지 않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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