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프하기 위해서
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
모호한 이야기 속에서 발견되는 메시지는 선과 악, 옳고 그름, 생물학적인 제약, 사회구조 등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을 마쳐야 한다는 것. 구원은 누군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구원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것. 변화는 내면의 여행을 필요로 하며 (영웅의 여정과 같이. 지하 세계에서 고난을 견디거나 괴물과 싸우고 이 세상으로 돌아오는)
성장은 개인의 여정이기도 하지만 세계의 복합적인 작용이기도 하다는 것.
이해하지 못할 사건과 동조자를 거치며, 어두운 그림자와 대면하는 소년.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떠올리기도 했으며(기묘한 인물들을 만나고 내면의 여행을 거쳐 성장의 길을 보여주는) 나를 대비해서 생각한다면 나가타라는 평범하지 않은 노인을 어떤 끌림으로 인해 따라다니는(나중에는 운명으로 결론 내리는) 호시노 청년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복잡하고 어려운 일은 피하는 성격에 생존하기 위해 지식은 필요로 하지 않는 인물. 자신의 경험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이 세상의 노동을 기꺼이는 아니지만 꾸역꾸역 성실하게 감내하는 인물.
소년(다무라 카프카)은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원하던 터프한 소년이 되어가고("제가 추구하는 것은, 제가 추구하는 강함은, 이기거나 지거나 하는 강함이 아닙니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을 받아치기 위한 벽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을 받아 거기에 견뎌내기 위한 강함입니다. 불공평함이나 불운, 슬픔이나 오해, 몰이해- 그런 것에 조용히 견뎌나가기 위한 강함입니다."), 평범한 청년 호시노는 기묘한 노인 나가타와 동행하며 변화를 일으킨다. 나가타는 호시노가 호시노가 되도록 이끌어주는 인물(작가의 의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이 된다. 호시노와 관계없이 나가타가 꼭 해야 하는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내가 아는 세상(상식적이고 일상적인, 내 경험으로 이루어진 세계)은 좁다. 이야기를 읽는 것은 그 좁은 시야 너머를 상상하게 한다. 굳이 지하 세계라는 곳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지금 싸우는 존재에 대해,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행동에 대해, 성장하기 위해 닥쳐오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대면하게 한다.
성장은 나와 세계, 나와 타인의 복합적인 작용이다. (이 두려운 마주침이 결론적으로 운명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자신의 것들이 흩어지고(표면적으로 이런 사건은 불운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세워지는(세워지려는) 날들에 대한 이야기.
우리들이 모두 멸망하고 상실되어 가는 것은, 세계의 구조 자체가 멸망과 상실의 터전 위에 성립되어 있기 때문이지. 우리의 존재는 그 원리의 그림자놀이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아.
무언가를 경험하고, 그것에 의해 우리 내부에서 무언가가 일어납니다. 화학작용 같은 것이지요.
다만 관찰하는 이성에서 행위하는 이성으로 뛰어 옮겨 가는 것, 그것이 중요하지.
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