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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남북녀 Feb 07. 2024

사랑을 주세요, 약이 아니라

발레리 발레르 <거식증 일기>


어린아이들은 자신을 방어할 줄 모릅니다.

                                            -발레리 발레르-


화를 내면(쏘아보는 눈빛으로 얼굴을 굳히고 날카로운 음성으로 아이에게 말하면, 고함을 지르면) 소리는 동공이 흔들린다. 평소의 강아지 같던 순하고 맑은 눈빛에 불안이 차오른다. 내 눈을 마주 보지 않고 바닥이나 옆을 본다. 활기가 모두 빠져버린 듯 푹 꺼진 느낌을 준다. 나도의 동공에서는 생기가 빠져나간다. 개구쟁이 같은 눈빛이 죽어가는 소처럼 끔뻑인다. 잠에 빠진다. 무기력함이 아이를 사로잡는다.


몇 번의 경험으로 화내는 방식에(폭력의 방식)에 변화를 줘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남편과 싸우는 방식으로 아이를 대할 수 없다는 것을


폭력에 둔감한 것은 어린 시절에 기인한다. 기억나는 싸움이 몇 건이요(칼과 물건이 던져지는) 상해를 입은 것도 몇 건이다.(멍이 들거나 날카로운 것에 찔리거나) 어른뿐 아니라 동네 남자 학생들(당시에는 오빠라 부른)에게도 부위를 가리지 않고 가격 당했다. 갑자기 얼굴로 주먹이 날아들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으나 남자 학생들은 폭력뿐 아니라 어린 동생들에게 성적인 언행도 일삼았다. 외모 품평이나 은밀한 농담들을. 성인이 된 후 기억이 떠올랐을 때 남자 학생들에게 고마웠다. 물리적 폭력만 가한 것에 대해


눈빛이 조금 사납다고 음성이 약간 높아졌다고 영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아이들의 모습에 화가 났다. 엄마도 사람인데 너희도 좀 너무 하지 않니? 사람이 고함칠 수 있는 거지, 화낼 수도 있는 거지.


<거식증 일기>는 이러한 생각에 경고를 준다. 하루 모자란 똑똑한 열세 살 아이는 소멸을 택한다. 서서히 죽어가는 자살을 선택한다. 사랑받아야 할 때 사랑과 멀어진 아이는  자신을 살리려는 부모의 모든 노력을 연기로 간주한다.("틀림없이 그녀는 단편영화를 연출하고 있으며, 나를 사랑하는 척 연기하고 있다.""연민을 느끼게 하는 장면을 연기하는 것이 그의 특기다.")


아이가 처음 접한 우주(부모)가 아이를 짐짝 취급했고 방해물로 여겼으며(이혼의 방해물) 부부 싸움에 이용했다. 서로를 비방하느라 서로의 애인을 살피는데 바빠 아이에게 갈 애정은 표현되지 않았다. 말 없는 아이는 투명 인간처럼 존재감 없이 부모 사이에 놓였다. 그 모든 모욕을 몸과 영혼에 새기면서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아이의 이상행동을 목격했을 때 엄마는 전문가를 찾고 병원에 아이를 감금한다. 아이를 살리기 위한 행동은 아이에게 트라우마를 남기며 부모에 대한 혐오를 더욱 부추긴다. 감금이 풀린 후에도 아이는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자의 엄마 역시 즐거운 환경에서 양육되지 않았다. 정신분석가에게 상담을 받으며 애인에게 끊임없이 집착하는 행위가 아이의 상처와 닮아있을 수도 있으나 이러한 것을 이해하기에 아이는 어렸다. 자신을 방어하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인 세상에 갇힌 아이는 부모를 이해하지 못한다.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서 부모를 원망한다. 아이는 부모 같은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없으며(적개심에 가득 차며) 온전히 살아가지 못한다. 부모에 대한 미움이 아이를 가둔다. 분리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상처, 경험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아이는 지금의 아이다. 과거와는 별개인. 지금 내 눈앞의 아이를 살펴야 한다. 배 아프다고 인상을 찡그리고 재미있는 일에 눈을 반짝이는. 사소한 말 한마디에 생기를 빼앗기는 한없이 작고 약한 존재를. 부모 역시 함정에 갇힌 상태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임을 아이가 이해할 때가 오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이는 성장하고 어른은 변화해야 한다.



그런데 너희 아빠는 딸을 원하지 않았어. 너를 처음 보고는, 너무 못생겼고 온통 시뻘겋고 머리카락도 거의 없다고 말하더라고. 213p

병적 증후가 전혀 없는 아이에게 트라우마, 즉 정신적, 육체적 외상을 입히려 들며, 아이를 잘못 양육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강요하여, 결국 아주 불행하게 만들어버린다. 234p

마음속에서 복수의 욕구가 자기 파괴적인 성향으로 변했다. 42p

거식증은 오랜 시간에 걸친 고통스러운 자살을 의미한다. 247p

아무도 귀 기울여 듣지 않는다. 313p

이 미친 듯한 비명은 내 심장과 목소리밖에는 찢을 수 없지만, 그것은 또한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소리이며 하소연이고 사랑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312p

내가 한낱 대걸레의 천 조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298p


발레리 발레르 <거식증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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