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을 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중 한 가지를 이야기해 보자면 아이의 독립이다. 기억에 의하면 어느 시기부터 어머니 없는 삶에 편안함을 느낀다. 씻어라, 먹어라, 갈아입어라, 코 파지 마라. 곧바로 눕지 마라, 정리해라 같은 말들 속에서 해방되는. 아픈 곳은 콕콕 찌르고 못하는 것은 날카롭게 찾아내는 어머니는 일종의 감시자다. 보살핌의 필요를 벗어나고 있는 아이에게는 “엄마, 제발 그만”이라는 불평이 나올 수 있다.
“엄마, 나는 중2병이 될 거야” 사춘기를 기다리는 열한 살에게서 독립의 씨앗을 보고 있다고 하면 비약이려나. 소리는 사춘기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간절하게 사춘기를 기다린다. 엄마, 아빠와 대항할 수 있는 시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다. 나야 소리에게 많은 자유를 허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나(특히 영상 보는 시간에서) 소리에게는 언제나 목마른 자유다. 네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엄마 없을 수도 있어, 도서관에 갈 거야. 소리는 웃음을 띠고서 그럼 나 쉬고 있을게 대답한다. 쉰다는 것은 핸드폰 보겠다는 말과 동급이지만 거부감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어른 없는 시간의 달콤함을 나 역시 알고 있기 때문에
“오직 어머니로서의 보람만으로 사는 사람은 자신이 이르지 못한 한을 자식을 통해 풀고자 함으로써 그들의 장래를 망칠 수 있다.”
이 구절에 시선이 멈추어지는 이유는 집안이라는 작은 공간과 아이들 속에서만 내 생활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일 거다. 에너지의 많은 부분이 가족의 일에 쓰이다 보니 그와 관련된 근심과 잔소리, 원치 않는 통제에 나조차 익숙해지는 듯하다.
‘인생은 결코 무상으로 지혜를 나누어주지 않는 법’이라고 책은 말하고 있다. 삶으로 뻗어나가느라 쌓아두던 찌꺼기들이 어느 시기 소용돌이를 일으킨다(이 시기를 융은 중년이라고 한다.) 소용돌이가 자아에 영향을 미치면 우울, 불안, 히스테리 등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내 속에 있는 어느 존재가(그림자, 내적 인격, 자기 어떻게 부르든지) 나에게 화해를 청하는 것이다. 이제 나 좀 봐줄래, 그럴 때가 된 거 같아. 소용돌이를 무시하며 외적인 일들에만 치중할 경우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 모두에게 해로운 영향을 끼칠 수 있다.
현명한 어머니로 보이기 위해서 아이는 어리석거나 말썽쟁이어야 한다. 인내심 있고 지혜로운 아내이기 위해서 남편은 난봉꾼이거나 손가락질받을 만한 행위를 해야 할지 모른다. 아내가 게으르고 집 밖의 즐거움을 모르는 꽉 막힌 사람이기에 남편은 편안하게 다른 여자를 만난다. 자신의 외적 인격(페르소나)만을 인지하고 있는 경우 잘못은 모두 다른 사람 탓이 된다. 주변인들은 자신을 괴롭히는 무리가 되고 사단이나 마귀의 이미지를 상대에게 덧 씌울 수 있다. 어머니로서의 보람만 찾는 사람은 숨 막히게 아이를 통제할 수도 있는 일이다. 햇빛이 부족하면 식물이 온전히 자라지 못하듯 부모의 짙은 그늘은 아이의 성장을 방해한다.
청년은 삶 속으로 뻗어 나가고 중년은 자신 속으로 뻗어나간다. 청년은 세상과 화해하고 중년은 자신과 화해한다.
내 한은 내가 알아서 할게, 너는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걸으면 돼. 초록 이파리의 손짓을 받으며 도서관으로 간다. 동굴 같은 그곳으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근심 걱정과 보살핌은 상대방의 자립심을 막으며, 오직 어머니로서의 보람만으로 사는 사람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한을 자식을 통해 풀고자 함으로써 그들의 장래를 망칠 수 있다.” 이부영 <아니마와 아니무스> p136
*분석심리학에서 소용돌이는 만다라의 상징과 연관되나 이 글에서 소용돌이는 마음의 혼란이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