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에 대하여
얼마 전에 나는 고운 색의 색연필로 둥그런 원을 그리고 싶었다. 둥그런 원 안에 칸을 내어 보기 좋게 적어 넣고 싶었다. 일어나서 독서, 아침 먹고 독서, 청소하고 독서. 점심 먹고 독서, 오후 독서, 저녁 독서. 취침 전 독서, 하루 종일 독서, 꿈속에서 독서.
융을 읽으며 ‘뿌리’라는 단어를 보게 됐고 내 뿌리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뻗은 적이 없다는 생각이 찾아들었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뿌리를 내린 적이 없기에 가지는 앙상했고 이파리는 시들했다. 어쩌다 열리는 열매는 쓰기만 했다.
일종의 나무는 바람 부는 대로 흔들렸고 임시로 잠재우는 방법을 잠깐씩 사용하며 안심했다.
오늘 이 바람만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먼 훗날을 생각하기에 나무는 불안했다. 나무와 관계없는 곳으로 뿌리는 뻗어 나갔고 제대로 된 영양분을 흡수하지 못했다. 비쩍 마른 상태로 존재를 이어가던 가지는 점점 더 뿌리와 관련이 적어졌다. 뿌리를 탓하기 싫은 가지는 “숨 막히게 싫은 공기야. 이번 생은 처음이라” 공기를 탓한다.
어둠 속에서는 살해가 일어났고 나무는 알지 못하는 어두운 길을 내달린다. 가뿐 숨을 뱉어낸다. 기운 없는 나무의 진액을 공기는 흡수한다. “악마 같은 것들” 나무는 자신 아닌 것들에 치를 떤다.
불일치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불행뿐 아니라 격렬한 무기력으로 이어진다. 전쟁 같은 무기력으로
일종의 나무는 자신을 이겨내려고 애쓰는 중이다.
나는 가끔씩 이를테면 계절 같은 것에 취해 나를 속이며
순간의 진심 같은 말로 사랑한다고
널 사랑한다고 나는 너를
이영훈 <일종의 고백> 중
세상에는 자기 자신을 망각하는 것보다 더 달콤한 것은 없다. 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뿌리를 너무나 견고하게 내리고 있어서 거센 파도마저도 그들을 뽑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은 화석화되어 너무나 무거운 반면, 자신을 망각한 사람들은 가볍다. 칼 구스타프 융 <레드북> p94
당신의 본래 모습을 찾는 것이 부활의 목욕이다. 깊은 곳에서, 존재는 무조건적인 지속이 아니라 끝없이 더디게 이어지는 성장이다. 당신은 자신이 늪의 물처럼 가만히 고여 있다고 생각하지만, 당신은 이 땅의 가장 깊은 곳을 덮고 있는 바다를 향해 서서히 흘러가고 있다. <레드북> p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