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원이라는 아이

by 북남북녀

혜원이라는 여자아이는 성숙해 보였다. 흰 피부에 굵은 테 안경을 끼고 반곱슬 머리를 단정하게 묶었다. 어린아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베이지색 점퍼를 입었는데 그게 또 무리 없이 어울렸다. 혜원은 공부를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고 남자아이들과도 여자아이들과도 어울린다. 조용하지만 소외되지 않고 주목받지 않지만 어떤 무리에 속해있어도 어색하지 않다.


그늘진 창 밑에서 나는 혜원의 움직임을 살펴보고는 했는데 어째서 저 아이는 모든 행동이 자연스러울까. 원래 그런 것이라는 듯이 스스럼없이 자신이 있는 공간 속에서 움직일까 신비로웠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을 혜원이라는 이름으로 결정한 것은 이런 이유다. 이런 이유가 무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당신을 위한 설명은 없다. 이게 내게는 최대의 설명이고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당신은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해하지만 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는 당신이 있다면 사람의 마음을 후벼 파는 못된 사람이다. 내 기준에서는.


내 기준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은 타인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상처받지 말라는 말이다. 개인의 기억은 개인의 기억일 뿐 개인의 기억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못된 사람이라고 말하는 내가 잘못된 사람이다. 당신이 무정한 것이 아니라 내가 무정하다. 언제나 그렇듯이


저학년 시절에 혜원은 비닐하우스에 산다고 손가락질을 당했고 고학년 시절에는 지하철역을 통과하여 학교로 향했다. 지하철역을 통과하면 다른 세상이다. 구불구불 울퉁불퉁 구덩이에 발이 빠져 걷기 힘든 길이 아니라 가로수가 심어 있는 잘 정비된 대로다. 이 동네 아이들의 부모는 사업가, 연예인, 의사, 검사 어디에서도 꿀리지 않는 명함을 가지고 있다. 이 동네의 아이들은 귀티 나는 외모에 깔끔한 옷차림을 유지한다. 선생님들도 눈치 보는 우등생들이다. 이 동네 아이중 하나가 혜원과 같은 성적을 받았을 때 신앙심이 투철한 남자 담임은 혜원에게 던지듯이 성적표를 건네고 그 아이에게는 아버지가 염려하시겠다는 말을 건네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는 것을 아버지에게 꼭 전달해 달라는 듯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하겠으나 혜원이 사는 동네는 이 동네와는 다르다. 무시받기 좋은 열등생들이 많은 동네라고 명명하여 또 한 번 비수를 꽂을 필요는 없다.


남녀공학 중학교에 다니는 혜원은 가급적 화장실을 가지 않는다. 1반이 남학생반이라면 2반은 여학생 반으로 무섭게 커나가는 남학생들을 복도에서 마주치는 것을 혜원은 피하고 싶다. 남학생들의 고함은 크게 울리고 애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어중간한 변화의 모습이 혜원에게는 공포심을 일으킨다. 혜원이 화장실 가고 싶은 것을 참으며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을 때 흰 봉투에 든 크리스마스 카드가 책상에 놓인다. 크리스마스 카드를 놓은 아이는 카드만 놓고 뒤돌아 빠르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저 아이가 나한테? 해독할 수 없는 카드에 공포감이 스멀스멀 혜원에게 다가온다.


카드를 놓은 아이는 의사 부모에 전교에서 일이 등을 다투는 모범생 아이다. 저 아이만 보면 선생님들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진다. 저 아이가 나한테 왜? 혜원은 혼란스럽다. 크리스마스 카드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다. 모른 척 쓰레기통에 넣는 것 외에는


새치가 한두 개 올라오고 점점 더 쪼그라드는 느낌이지만 혜원은 나이 들어가는 것이 나쁘지 않다. 치열하게 살지 않아도 부끄럽지 않고 지나가는 것은 또 지나가도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나이 아닌가. 공포 속에서 물처럼 흐르고 있다고 혜원은 안심한다.


오랜 불면증 탓으로 혜원이 새벽녘에 간신히 잠들었을 때 꿈속에서 그 아이를 만난다. 혜원의 책상 위에 크리스마스 카드를 놓아 공포심을 일으켰던 아이. 그 아이뿐만 아니라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여럿 있다. 주변은 어두운데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손을 잡고 둥그렇게 원을 만든다. 혜원 오른쪽 손을 크리스마스 카드 준 아이가 잡는다. 왼쪽 손은 그 아이와 일이 등을 다투던 크리스마스카드를 준 아이와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또 한 명의 우등생이다. 어두운 가운데 화면이 공중에 띄어지며 크리스마스카드를 준 아이가 전학 가기 싫다고 쓰러지며 운다. 아기처럼 허공에 다리를 구른다. 격렬한 그 아이의 슬픔을 혜원은 영화를 보듯이 바라본다.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손을 잡고 둥글게 원을 그리며 돈다. 강강술래를 하는 듯이


우리는 손을 잡고 둥근 원을 그리며 춤을 추는 사람들이다. 어둠 속에 뿌리를 내리고 이 세상에서 자라는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다. 식물 같은 인간들아. 공포심이 혜원에게 알려온다. 혜원의 고막이 터지듯 울린다. 신체가 쪼그라드는 고통이 밀려든다. 공포심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혜원은 여전히 웅크리고 살고 있다. 겁먹은 생쥐는 갉아먹을 나무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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