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라구,지렁이
버지니아 울프 디 에센셜을 읽고
잠깐 저기 까만 게 뭐지?
이런, 이를 어째. 지렁이가 개미 수백 마리에 둘러싸였어.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것을 보니 아직 살아 있는데. 비 온 후 공기가 희박했을 땅속에서 지상으로 올라온 지렁이는 왜 개미 밥 신세가 된 걸까. 어쨌든 개미에게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기력이 없는 건 분명해. 산 채로 죽어가는 운명에 처하다니, 가여워라
'엄마는 매일 그 옷만 입더라, 다른 엄마들은 치마도 입던데'
옷을 사야 해, 화장품도 사야지. 이제 그럴 때가 된 거야. 한동안 편하게 잘 있었지.
아, 먼저 겨울옷을 넣어야 하는데, 수납할 곳이 없네. 언제 장난감이 이렇게 많아졌을까.
그나저나 이번 달 경조사가 몇 개야 대체. 가족의 달인데 뭘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어버이날 선물은 날짜에 맞춰서 미리 결재해야 하고.(날짜를 잘 맞춰야지 너무 이르면 분위기가 안 살고 너무 늦으면 또 기분이 별로일 테니)
어린이날 선물은 미리 사서 포장해야지, 아침에 짠하고 아이들을 놀래 주면 아이들이 엄청 좋아할 거야. 요즘 아이들이 좋아하는 게 뭐였더라. 어몽어스 레고? 책? 구두? 분홍 원피스? 아 모르겠다, 뭘 사야 할지...... 우선 아이들 점심 준비를 먼저 해놓고. 응? 이게 뭐야 대체. 부엌에 먼지가 가득이야. 그릇장도 한 번 닦고 레인지 후드의 기름때도 싹 제거해야겠어. 청소용품이 어디 있더라, 베란다에 뒀는데. 아니 그런데 베란다에 둔 야채는 왜 이렇게 곰팡이가 핀 거야. 통풍도 잘 되는데.
에구, 아까워라. 다 버리게 생겼네. 불량주부야, 불량주부. 이렇게 게을러서야. 쯧쯧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잖아. 대체 집안에서 하는 일이 뭐야, 이 아줌마야. 이게 대체 얼마치야. 아휴, 미리 손질해서 냉장고에 넣었어야지. 왜 놓고 잊어버리기를 잊어버리냐고.
오메, 후두에 묵은 때 좀 봐. 이런 곳에서 요리를 했다니 간도 크지. 아이들한테 먼지 덩어리를 먹인 거야, 세상에. 엄마라는 사람이 어쩌면 이럴까. 욕을 들어도 싸지.
(손으로는 후두 청소를 하면서)
아이 한글을 떼야하는데 어떻게 지겹지 않으면서 흥미롭게 배우게 할 수 있을까.
재미없으면 난리가 날 텐데. 한글 가르치는 공부방에 맡기고 싶어도 계속 봐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을 테고. 휴, 산 넘어 산이야. 산.
이런! 은행에 오늘까지 이체해야 하는 게 있었는데 깜빡 잊고 있었네. 공인인증서로 은행에 들어가서 관리비에 세금을 이체하고 아이 학원비도 넣어주고.
아, 아이 숙제를 봐줘야 하는데. 일주일 한 번 하는 독서노트가 내일 제출이던가.
여름옷이 작아졌던데 여름옷도 준비해야 하고. 여름옷 사기 전에 겨울옷부터 세탁해서 다 집어넣어야지.
일을 좀 순서대로 진행하라고. 정신없이 좀 하지 말고.
무슨 일을 그렇게 마구잡이로 해, 그러니 매번 일이 이상하게 꼬여 버리잖아(알밤을 맞아야 해, 알밤을. 집에 하루 종일 있는 주부가 왜 이렇게 일이 밀리는 거야. 대체.)
에고 힘들어. 하는 일도 없는데 힘만 드는 하루야. 조금만 누워 있어야겠어.
어라 이게 무슨 냄새지? 킁킁. 이 퀴퀴한 냄새가 뭐야. 이불 세탁을 언제 했더라.
(고개를 도리도리) 치매야, 치매. 대체 집안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빨리 이불이나 걷어서 한바탕 세탁이나 하라고. 아이 있는 집 이불이 이게 뭐야
먼지가 풀풀. 이러니 아이가 기침을 하지. 엄마가 이 모양이니. 저런 딱해라.
이불이랑 베갯잇을 얼른 바꾸라고, 엄마가 돼가지고. 변변치 못하게.
에구 이불이 바닥에 떨어졌네. 이건 또 뭐야. 바닥 문틀에 먼지가 한가득이야.
한 달에 한 번은 문틀 먼지 제거를 했었어야지, 대체 언제 한 거야. 얼른 버리는 양말이나 주워오라고.
버리는 나무젓가락에 꿰어서 방방마다 문틀 먼지 제거 좀 하게. 이게 사람 사는 집안 꼴이야. 쯧쯧. 가족들이 불쌍하네. 불쌍해, 엄마가 이 모양이니.
아 그래, 아까 지렁이를 봤는데. 지렁이. 지렁이가 수백 마리 개미에게 먹혀들어가고 있었지. 새카맣게. 불쌍해라. 어쩌다가 그렇게 됐을꼬. 자기보다 훨씬 작은 것들한테 먹혀들어가다니 조금만 힘을 내면 좋았을 텐데.
내가 지렁이 말을 할 줄 안다면 ‘너는 지렁이야, 개미보다 훨씬 힘이 센. 얼른 일어나라구 지렁이!’라고 말해줄 수 있었을 텐데. 살기 위해 땅 위로 올라오는 과정이 힘들었던 걸까. 어쩌다가 그렇게 힘이 쏙 빠져버린 걸까. 그 작은 개미들한테 벗어나지 못하다니.
이상하지. 이상하게 피곤해. 한 것도 없는데. 조금만 눕자고 누워. 삭신은 또 왜 이리 쑤시는 거야.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네. 몸은 또 이렇게 부실하고 내 참.
버지니아 울프. 침대 위에 버지니아 울프 책이 있지? 넌 대체 언제부터 굴러다닌 거냐. 정신머리 하고는. 어디까지 읽었더라. 집안의 천사? 맞아. 집안의 천사 이야기가 있었는데. 집 안의 천사는 가정생활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한다고, 그것도 탁월하게. 부러워라. 그런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한테 딱 필요한데.
집안의 천사는 매일매일 자신을 희생한다고? 희생정신이 투철한가 보네. 집안 꼴은 희생하는 사람 한 명 정도는 있어야 제대로 돌아가지.
외풍이 들어오는 곳이면 그곳에 앉는다고. 저런 추울 텐데. 정말 천사 맞네.
“간단히 말해서 자기 나름의 마음이나 소망이 전혀 없고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나 소망에 공감하도록 생긴 여자입니다.”
흠, 공감력이 좋은 여자인가 보군. 그러니 천사겠지.
뭐? 이 여자를 죽인다고? 온 힘을 다해서 죽인다고? 천사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기 때문에 자기 방어라고?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참 까다로운 작가네. 뭐 죽이기까지.
가족을 위해주는 게 뭐 어떻다고......
이럴 시간이 없는데. 얼른 일어나 저녁을 준비해야지. 된장국을 끓이려면 육수를 내야 하고 야채 손질도 해야 하고. 이런 아이가 낮잠에서 깨서 우네. 저녁 준비를 어떡한다? 대체하는 일이 뭐야, 이 맹추. 저녁 준비 정도는 미리 해놨어야지.
우선 아이부터 돌보라고. 네가 제대로 아이를 돌봤으면 아이가 울겠냐고. (고개를 도리도리)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군. 내가 하는 일이 이렇지, 뭘. 뭘 더 바래.(도리도리)
참, 지렁이. 지렁이는 왜 자기보다 작은 개미에게 먹히는 걸까. 살려고 기를 쓰고 올라온 길이 죽을 길이 되다니, 가엾어라. 정말 가엾어. 그 지렁이 화단에라도 옮겨줄걸. 계속 생각나는 거 보니 분명 내가 지렁이에게 무슨 잘못을 한 거야. 무슨 잘못일까. 회개를 해야 하나, 고해성사를 해야 하나. 생명을 경시한 죄인가?
이번 주도 죄가 늘었네. 늘었어. 성실하지도 못했고. 아기는 울고. 집은 엉망이고. 게을러, 이렇게 게을러서야.(도리도리, 도리도리)
나는 그저 다른 무엇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라고 간단하게 그리고 단조롭게 중얼거릴 뿐입니다.
버지니아 울프 디 에센셜 27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