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마지막 날은 아니겠지만
허수경 <정든 병>
그러니까, 당신도 살아. 설거지를 하거나 멍하니 있을 때면 이 말이 몸 어딘가에서 솟아난다. 그러니까, 당신도 살아. 읽지 않은 책 제목이라고 기억한다. 읽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는 책 중 하나. 제목에서 비장미가 느껴지는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연이 얼마나 구구절절할지, 쓴 사람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제목만 들어도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다.
공포보다 무서운 건 슬픔이다. 가볍고도 가볍게, 세상의 무게를 줄여줄 것 같은 같은 책을 고른다. 그럼에도 얼핏 본 <그러니까, 당신도 살아>라는 책 제목이 뇌리에 박혔다. 문득문득 떠오른다.
만화책과 농구스타에 열중하던 때가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여서 서 너 명이 모이면 만화책이나 농구선수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땀이 줄줄 나고 갈증으로 목이 타는 계절에 한 친구 집에 들렀다. 친구 집에는 회색 시멘트가 발라져 있는 수돗가를 갖춘 마당이 있었다. 더위에 지쳐 우르르 몰려간 아이들은 친구 집 마루에 책가방을 벗었다. 친구 어머니가 내온 찬 수박과 물을 마시며 만화책 이야기와 농구스타 이야기로 열을 올렸다.
저 앞에 목줄에 매여 있는 강아지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하얀 바탕에 검은색, 갈색이 섞인 그 시절 흔히 볼 수 있는 똥개류였다. 강아지의 털이 윤기가 없이 바싹 마른 느낌이었다. 몸의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눈 밑에는 말라붙은 눈물자국이 있고 바둑알을 연상시키는 까만 눈에는 슬픔이 가득했다.(고 생각했다) 포동포동, 포슬포슬, 방긋방긋해야 할 아기 강아지의 생기가 다 사라져 버린 듯이 보였다. 귀도 쳐지고 눈도 쳐지고 몸도 쳐졌다.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하느라 웃음꽃이 피어나고 있는 마루 위에서 강아지 눈이 슬퍼 보여, 무심코 내뱉었다. 작은 목소리로 무심코 나왔던 그 말에 와하하 폭소가 터져 나왔다. 부끄러웠다. 슬픔도, 강아지도, 나도. 슬픔은 숨겨야 하는지 모르겠네, 강아지도 그래서 짖지 않는 거야라고도 생각했다.
그런 일들은 지금도 가끔 벌어진다. 우르르 쾅쾅 천둥번개 치는 날, 급하게 슬리퍼를 끌고 아이를 쫓게 만들기도 하고 다 큰 아이를 안고 우산을 받치며 힘겨운 자세로 걷게도 한다.
비애감에 잘 빠져들어 우르르 쾅쾅 천둥번개 치는 날이, 검고도 낮게 드리워진 하늘이 오늘뿐만은 아니라서 오늘이 꼭 마지막 날 같네, 라는 생각도 자주 찾아든다.
영상을 보고 싶어 하거나 사탕 같은 단 군것질을 아이들이 원할 때 제한을 많이 두지 않는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이까짓 사탕쯤, 이까짓 영상쯤이 되어 겨울을 생각하지 않고 노래하는 베짱이 같은 생활이 된다. 지금 즐거우면 된 거지, 라는.
허수경 시인은 노래한다. 이 세상 정들 것 없어 병에 정든다고.
사람은 적응하며 살게 마련이고 나는 말라비틀어진 눈 밑 털이 있는 강아지와 정이 들었다. 세상은 내게 조금쯤 그렇다.
강아지는 슬프지 않을 수도 있었겠으나, 슬펐을 수도 있었을 거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생후 한 달 됐다고 했다. 친구 집에 온 지 얼마 안 됐다고 들었다. 어미를 떠나 한 주택가 마당에서 목줄을 차고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슬픈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쪽에서는 저같이 작은 아이들이 무리로 보여 시끌시끌 웃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는 더욱더.
오늘이 마지막 날은 아니겠지만, 지금은 언제나 마지막이다. 순간은 찰나로 지나간다.
당황하기보다 용기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털을 쓰다듬으며 눈 맞춤하는 용기가 있었다면. 목줄이 없다고 내가 너와 달리 한없이 자유로운 것은 아니야, 나도 비슷해라고 말해줄 수 있었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었을 테니까.
이 세상 정들 것 없어 병에 정듭니다.
가엾은 등불 마음의 살들은 저리도 여려 나 그 살을
세상의 접면에 대고 몸이 상합니다
몸이 상할 때 마음은 저 혼자 버려지고 버려진 마음이 너무 많아 이 세상 모든 길들은 위독합니다 위독한
길을 따라 속수무책의 몸이여 버려진 마음들이 켜놓은 세상의 등불은 아프고 대책없습니다 정든 병이 켜놓은 등불의 세상은 어둑어둑 대책없습니다.
정든 병. 허수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