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뒤를 돌아봤다. 열차였다. 바로 뒤에(바로 뒤는 아닐 수 있으나 기억은 그렇다) 시커먼 화물열차가 있었고 친구와 나는 얼른 옆으로 비켜섰다. 열차가 지나가면 땡, 땡 소리가 크게 나면서 차단막이 내려가는 길을 친구와 함께 걸을 때였다. 왜 우리가 뒤를 돌아보게 됐는지는 기억에 없으나 철길을 따라 걷는 중 뒤를 돌아봤고 옆으로 비켜섰으며 (검은 화물열차가 우리 옆을 빠르게 지나갔다) 죽을 뻔했네, 웃으며 말한 기억이 있다.
그 순간에 이어 또 한 번의 죽을뻔했네, 기억이 있다. 땡땡 거리가 중학교 시절이라면 다음 기억은 초등학교 때다. 더 어린 시절, 그래서 할 수 있는 게 더 적은 시절.
이름이 순자였다. 위로 중학교 오빠가 있는 순자는 초등학교 때부터 일하는 엄마를 대신해 집안일을 했다. 학교가 끝난 후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밥을 짓는 게 순자의 일이었다. 나는 순자와 놀고 싶었고, 순자 역시 나와 놀고 싶어 했으나 순자의 할 일은 항상 많았다. 집안일 때문에 바깥에서 놀지 못하는 순자네 집으로 놀러 가면(바깥에서 노는 것을 엄마에게 들키면 순자는 혼이 났다) 순자는 바삭하게 구운 김에 찬 물을 부어 김국을 만들어주거나 김치 국물에 국수를 말아주고 집안일을 했다. 방바닥을 닦거나 쌀을 씻어 안 치는 순자 옆에서 나는 종알종알 이야기했고 순자 역시 손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내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했다. 단짝 친구라고 생각하는 우리는 같이 있고 싶었고, 순자의 집안일이라는 장벽이 있었으나 재미있는 시간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순자네 어머니가 일을 마치고 오면 그런 우리를 보면서 성을 냈다. 지금까지 밥도 안 해놓고 뭐 했냐고 하거나 청소한 방을 보면서 이게 치운 거냐고 타박하거나. 순자가 혼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조용히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 날, 순자가 울면서 우리 집으로 뛰어왔다. 여름 한낮이었고 방학이었으며 집에는 동생과 나 둘 뿐이었다. 순자의 다급한 얼굴을 보고 나는 얼른 옷장 안으로 순자를 밀어 넣었고 그때 일곱 살쯤 된 동생에게는 순자의 오빠가 오면 순자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리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
얼마 지난 후 순자의 오빠가 씩씩대며 순자 있냐고 소리치며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없다고 고개를 흔들었는데 동생은 무의식적으로 옷장 쪽을 바라봤다. 순자의 오빠는 옷장을 향해 소리쳤다.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빨리 나와. 순자는 울면서 나왔고 내가 순자 쪽으로 가는 중에 순자 오빠가 손에 갖고 있던 큼지막한 자물쇠를 던졌다. 나는 그 자물쇠가 내 쪽으로 와서 나를 맞추리라 생각했다. 지금도 그 장면을 생각하면 슬로비디오처럼 날아오는 자물쇠가 내 앞에 보인다. 저 앞에서 나를 향해 느릿느릿하게 날아오는 커다란 자물쇠가. 순간 눈을 감았다. 죽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물쇠는 심한 멀미감을 일으키고서 내 발밑에 뚝 떨어졌고 순자는 오빠에게 머리채가 잡혀서 끌려 갔다. 순자의 비명소리가 동생과 내가 있는 방 안에 가득 찼다.
두 번째 죽을 뻔한 기억은 여기까지다.(여기까지였다)
동생은 직장 생활을 할 때고 나는 첫째 아이의 육아로 한창 바쁠 때다. 늦은 나이에 아기를 출산하고 새로 맞닥뜨린 육아에 정신없어하는 나를 도우려고 동생은 뻔질나게 우리 집에 드나들었다. 커피나 케이크 같은 먹을거리도 사 와서 아기를 재워놓고서는 둘이서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그러던 중에 나온 이야기다.
언니도 나 때려서 빗 부러진 거 기억 안 나? 아니 전혀. 내가 왜 너를 때렸지? 그때 순자 언니가 오빠 피해서 우리 집으로 피신 왔는데 내가 알려줬다고 언니가 화가 나서 빗으로 내 머리 쳤잖아. 그때 빗이 두 동강 났고.
내 기억은 순자의 울음과 발밑에 떨어진 커다란 자물쇠였고, 동생의 기억은 두 동강 난 빗이다. 지금 이 기억은 두 번째 죽을 뻔한 기억으로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