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수 있습니다

by 북남북녀

문을 여니 쓱, 들어왔다. 우와, 얼굴이 하얗네 팔다리도 길고. 공주님 같이 예쁘게 생겼다. 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고 나는 지금 이 모든 상황에 짜증이 치밀어 오릅니다, 는 표정을 띠고 있기는 했지만.


부동산에서 미리 연락을 줬다. 며칠 전 집 매매 계약서를 작성한 중년부부의 딸이 이사를 급구 반대해서 오늘 오전에(학교 안 가는 토요일이니) 방문해서 딸과 함께 집을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요즘 애들은 고등학생이라는데 성인 같네, 라는 할머니 같은 생각을 하면서 아이를 아니, 학생을(나보다도 키가 크다) 보고 있었다. 부부는 시골에 땅과 집을 샀다고 했다. 주말에는 내려가 농사를 짓다가 노후에는 완전히 그곳으로 옮기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집 평수는 줄이자는 것이 부부의 생각이었고, 아무리 신축이라도 좁은 집으로는 이사 갈 수 없다는 것이 딸의 생각인 듯싶었다.


딸은 작은방부터 건성건성 보기 시작했다. 이 창고 문 괜찮지 않니? 중간문이랑 같아. 집이 깨끗하지? 이 방을 네 방으로 하면 딱 좋겠어라는 부인의 이야기에 딸은 전혀 표정을 바꾸지 않는다. 대답도 없다. 깨끗한 집보다는 넓이가 중요한 모양이네,라고 나 혼자 생각하는데 그 사이 딸은 아무 말 없이 쌩하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화난 상태라는 것을 숨기지 않고서.

중년부부는 어떻게도 못하겠는 자세로 딸 앞에서 쩔쩔매고 있다가 감사합니다, 인사하고는 딸의 뒤를 급하게 쫓아갔다.


십여 분 뒤,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다. 딸이 이사를 절대 못하겠다고 하니 계약을 무르자는 내용이다.


임신 8개월 차에 들어선 나는 부푼 배를 쓰다듬으며 자식이 대단하네, 말했고 남편은 난감한 표정으로 은행으로 들어가 계약금을 돌려보냈다.

어떻게 자식 때문에 집 계약을 무르지, 딸 앞에서 쩔쩔매던 부부의 행동을 생각하며 예비엄마, 아빠인 우리는 이해가 안 된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때 뱃속에 있던 아이가 세상으로 나와 소리라는 이름을 짓고 이 년쯤 지난 뒤다. 아이의 변비가 심해 병원을 갔다. 소리는 병원 앞에서부터 울부짖으며 거부했고(관장했던 경험이 있다) 나는 어떻게든지 달래서 진료를 받게 했다. 수납을 하고 처방전을 받아야 하는데 소리가 울면서 밖으로 뛰어나간다.(관장을 할까 봐 그런 듯싶다) 깜짝 놀라 수납하는 도중 뒤쫓아나갔는데 복도 맨 끝의 미용실로 들어간다. 미용실 테이블 밑으로 쏙 들어가더니 나오지 않는다.


갑자기 아이가 울면서 뛰어 들어와 테이블 밑으로 들어가니 미용사는 무슨 일이지 놀란 눈치다. 테이블 밑에서 소리를 부르며 나오라고 아무리 달래도 꼼짝도 않는다. 미용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수납을 하러 혼자 병원으로 돌아갔다.


수납 후 와서 달래는 데도 소리는 꼼짝도 안 하고 테이블 밑에 숨어 있다. 좋아하는 온갖 간식거리들을 꺼내 보이는데도 요지부동이다. 난감하네, 싶은데 버스 생각이 난다. 우리 버스 타러 갈까, 라는 말에 버스를 좋아하는 소리는 진짜냐고 미심쩍게 물어온다. 진짜, 이제 병원 안 갈 거야.

소리가 조심스럽게 테이블 밑에서 나온다. 버스 타러 가자고 내 손을 잡는다. 소리의 손을 잡고서 미용사한테 인사를 하는데, 미용사의 얼굴은 그때까지도 이게 무슨 일이지 황당한 표정이다. 그러면서도 소리의 손에 사탕 하나를 올려준다. 감사합니다, 인사하고 미용실 문을 열었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서로 손을 꼭 잡고서.


예비 엄마, 아빠에서 두 아이를 키우는 지금은 그럴 수 있겠다고 예전 일을 회상한다. 자식 때문이라면 집 계약을 무를 수 있지요, 그럴 수 있습니다 라고.

아이와 함께 하는 생활은 별별 일이 다 있고, 별별 일이 나를 키워가는 느낌이다.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어라는 끄덕임이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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