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고 온 편지

by 북남북녀
우리 몸에 그때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런 것을 누가 명확히 단언할 수 있으랴

무라카미 하루키 <일인칭 단수>에서


캄캄한 빈 공간을 들여다보는 아이. 사사삭 빈 공간에서 들려오는 소리. 아이는 어느 순간 밑으로 빨려 들어간다. 발에서는 미끈한 감촉이 느껴지고 얼굴로 무언가 날아와 부딪힌다. 어지럼증이 나면서 눈을 감는다. 사다리가 없다, 나갈 수가 없다 생각하다가 눈을 뜨면 다른 공간이다. 의식이 밑에서 올라오는 데는 얼마의 시간(몇 초, 몇 분이나 체감상으로는 길다고 느끼는 시간)이 걸린다.


그 집을 설명하려면 난감해진다. 아파트라면 복도식이니, 계단식이니. 입구 방이니 안방이니 말할 수 있을 듯한데(주택이라면 현관으로부터 시작되는 구조로) 그 집은 일반적인 구조로는 설명하기가 애매하다. 소수의 사람만이 그 집을 경험했을 것이기에 여기에 집이 있어요, 하면 어쩐지 무책임한 느낌이다. 여러 사람이 각자의 경험으로 떠올릴 집과는 거리가 있는 곳이기에.(지금은 평지가 되어 고급 아파트가 들어선 곳이 됐다 하더라도)


몸은 마비되는데 의식은 깨어 있는 현상을 그 집에서 처음으로 경험했고, 날개 달린 엄지손가락만 한 바퀴벌레도 보게 됐다. 손톱만 한 바퀴벌레는 흔하게 접해온 까닭에 노트나 책받침으로 쳐서 납작하게 만드는 기술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작은 것들은 별다른 위협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보기가 좋지 않을 뿐) 불을 끄면 사사삭 들려오던 날갯짓 소리는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부엌을 사이에 두고 창이 있는 방과 창이 없는 방이 있었으며 창이 있는 방에는 창과 연결된 테라스 공간이 있었다. (성인이 아닌 내가 들어가도 움직이지 못하는 비좁은 공간이라 나가 본 날이 손에 꼽히기는 하지만) 테라스 밖으로는 널따란 잔디밭이 펼쳐있다. 교회가 연상되는 붉은색 건물과 사무공간이 연상되는 노란색 건물이 보이고 외국인 남성이나 아이가 공차기하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다. 해마다 7월 4일이면 미군의 독립기념일 불꽃놀이 축제로 텔레비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창이 있는 방에서 나오면 밖으로 연결된다.(현관도 현관문도 없다) 왼쪽으로 돌아보면 한 사람이 허리를 굽혀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에 검은색 가스레인지가 놓여 있다. 허리를 굽혀야만 하는 이유는 허공 중간에 나무틀을 놓고 세워진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 곳과 연결해서 평상처럼 만들어진(나무 막대기를 세워서) 공간이 나온다. 부엌 보다 높게 세워져 틈새를 들여다보면 허공이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차는 그 공간에는 붉은색 호랑이 이불이 언제나 펼쳐 있다. 대낮에도 캄캄한 그곳에 나는 자주 누워있었다. 이불에서는 햇빛과는 먼 냄새가 맡아졌다. 바닥이 밑으로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라는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생각만으로도 어지러워 눈을 감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중에 다른 나라로 이민 간 친구의 편지가(배달부가 일부러 그러지는 않았겠지만) 옆집 뒷마당에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편지는 저만치 아래에 있었다. 난간으로 머리를 빼고서 한참을 쳐다봤다. 산 동네 골목을 굽이굽이 돌아 옆집을 찾아낼 의지는 없었고, 의지를 비틀고 짜내어 옆집을 찾아낸다 하더라도 초인종을 누르고서 편지가 떨어져서요, 말할 용기는 더욱 없었다.


떨어진 편지를 쳐다보는 것이 일이었으며, 어느 순간은 텔레비전으로 잊어버리고 어느 순간은 잠을 자며 잊어버렸다. 편지라는 말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은 날이 오고 비 오는 날 젖어 있는 편지를 한번 본 것이 이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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