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담 삐삐 Mar 29. 2020

[텃밭일지] 디데이 전날 풍경

숨길 수 없는 나의 습, 나의 패턴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전까지 달리면 1분 만에 바위 하나 없는 품을 연 나의 바다가 있는 곳에서 자랐다. 나의 바다, 이곳에서의 삶이 중장년을 바라보는 이 나이까지 어떻게 영향을 미칠 것인가 그때에는 상상을 하지 못했다. 서울에서 산다는 생각도 막연히 해봤지만 실제 불가능이라고 여겼고, 무엇보다 그리 원하지도 않았다. 해외에 공부를 하러 갈 수도 있겠지만 거기서 산다는 것 역시 별 기대나 바람 같은 것이 없었다. 늘 바다와 가까이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해서 의심조차 없었다. 그만큼 도시의 광경은 내게 별 매력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대학도 시골 고향집에서 가까운 시내로 진학을 했는데 경주시의 풍광이란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다른 중소도시들보다도 조성하지 않은 자연이 옆에 있다. 도시 자체가 공사를 맘껏 할 수 없는 유적지이기도 하고, 유물이 나오면 공사하는 사람들이 발굴 비용를 내야 하는 억울함이 있어서 집의 창고 하나 지으려고 땅을 파다가 그릇이라도 나오면 조용히 땅을 덮는다. 땅 가진 사람들이야 억울하겠지만 나같은 무동산(?)인 사람은 경주가 참 좋았다. 눈 돌리면 물과 땅이 있고, 걸어가면 둑길에 꽃들과 식물들이 있고, 늦은 오후 해오라비가 때로 날아가는 하늘을 볼 수 있었다.

경주에서 살다가, 경주 가까이서 죽을 줄 알았다.

태어난 곳에서 자라서 태어난 곳 언저리를 왔다갔다 하다가 태어난 곳에서 죽는 자연스러운 옛사람의 삶의 방식을 따르기가 어려운 시대를 사는 나는 어느새 서울에서 산 시간이 고향과 경주에서 산 시간과 같아졌다.

생활방식과 문화는 서울사람인데 정서적으로 고향 바다에 있는 이방인 같을 때가 종종 있다.

늘 바다가 고프다. 서울에 오자마자 향수에 걸려 몸살이 났고 밤새 울었다. 그 뒤로도 미칠 것 같이 가슴이 답답하면 우짜든동 바다나 물가로 가야 했다. 그게 세월이 흐르니 참을성이 꽤나 높아져서 안가도 눈앞에 나의 바다를 그려보곤 한다. 그러면 조금 마음이 편해진다.  


서울에서 청년기를 보내는 동안은 불안정한 삶에 정주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경제적인 것도 그렇지만 심리적으로도 어디 기대어 산다는 것이 가능치가 않았다.

그러다 동네를 만나고 사람들을 만나고 마음을 여는 것도 배우고, 20대부터 가슴에 품고 있는 버킷 리스트를 하나씩 실현하고 있다. 하나씩 시작할 때마다 다른 삶의 결이 빗장을 여는 것 같다. 

시도하는 순간, 선택하는 순간에. 


첫번째가 불안정한 삶이어서 감히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고양이 입양. 옆의 동료들이 같이 돕겠다는 말에 기대어 구조한 길고양이 자매를 데리고 산지 6년이다. 고양이들이 준 영향은 언젠가 길게 시리즈로 써야 한다. 짧게 한두마디로 정리할 수가 없다. 이 글에서는 그저 내게 '사랑'을 알려주러 온 존재들이라는 것 하나만 밝힌다.


경계심이 지독한 내가 선택한 두번째의 버킷 리스트는 탱고이다. 90년대 미개봉한 무삭제판 해피투게더를 보고 저 춤은 꼭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남자와 부둥켜 안고 춤을?!!!! 세상이 두쪽 나도 그건 못한다였다. 그런데 절대 안하는 것, 절대라는 말 함부로 쓰면 안된다. 결국 원하고 생각하다보니 기회는 왔고 두어번의 실패 끝에 결국 탱고의 길을 가고 있다. 몸으로 하는 예술은 머리를 쓰는 것 도구를 사용하는 것돠 전혀 다른 원초적인 감각이 있다. 죽을 때까지 걷을 수 있는 그 순간까지 서툴게나마 탱고를 출 것이다.


세번째가 식물인데, 이것은 종종 텃밭상자나 화분에서 키우기는 했다. 생명을 돌보고 초록색을 곁에 두는 것과 내 먹을 것을 키워서 먹겠다는 인간의 유전자에 기록되어 있는 경작본능이 시시 때때로 실행을 하게는 했다. 다만 화분의 작은 흙에 갇힌 작물의 한계에 늘 부딪혔고 버티고 살아있는 식물들에게 미안했다. 마포구의 빼곡한 주택가에 사는 나는 이 꿈은 선택을 해야 하는 위의 두가지와는 다른 경제적 불가능이었다. 그렇다고 밭을 돌보기 위해서 면혀증도 없는 뚜벅이가 한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가야하는 주말 농장 생활은 무리수여서 포기. 그런데 생각하면 기회가 온다했던가. 믿지 않는 그런 말을 떠올리게 되었다. 올해 마포구와 고양시 경계지역에 삼각모양의 텃밭에서 분양을 하는 사업이 시작되고 추첨이라는데 되나 안되나 신청을 해봤다. 

만세!!!!!! 나는 드디어 작은 밭 하나를 경작할 수 있게 되었다. 지원사업에 선정되었을 때보다 더 기뻤다.


버뮤다삼각텃밭의 OT가 있는 날이 다가올 무렵. 나는 나를 다시 마주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인간의 습이란, 패턴이란... 가장 마지막에 바뀐다고 하지 않았나. 나의 헛발질은 무죄, 그러나 멈출수 없는 진격이다.

인간이 태어나서 처음 책임을 지고 수행해야 하는 미지의 과업을 대할 때 어떻게 시작하는가. 몸으로 직접 부딪혀 감각을 익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의 그림을 먼저 상상해서 와꾸(?)를 입체적으로 그리기도 한다.

그러면 나는?

나는 물론 그림을 좋아하고, 공간 구성이나 배치, 칼라, 패턴에 예민하고 보는 것 뿐만 아니라 누리는 것도 좋아한다. 그것도 내가 조금 아는 영역에서 그렇다. 1도 모르는 것을 향해 나아갈 때 나의 선택은 무조건 일단 텍스트 수집이다. 본능처럼 텍스트를 수집해서 자료를 정리하고 공부를 하며 쫓아간다. 이 깨지지 않는 범생이의 습은 텃밭을 대하는 나의 자세에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당연하게 제일 먼저 책을 샀다. 으흐흐흐... 헛헛하게 웃으면서 아, 또 시작이다 생각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나의 머리는 이미 알고 있다. 텍스트가 씨앗을 키우지 못하고 문제점을 전혀 해결해주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특히나 농사에서는 말이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모른다는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서 어리석은 인간이 선택하는 것은 책읽기와 공부이다. 책을 보면서 씨앗을 구입했다.

뒤이어 문화예술 기획을 업으로 하는 사람의 습이 짜잔~  행사용품 정리하듯 차곡차곡 메모하고, 시간별 할 일 차트 구성하듯 관련 내용을 도표하나에 정리해서 넣고, 책에 기반해서 밭의 작물 배치도를 그려서 출력했다. OT에서부터 같이 할 텃밭 동료들과 나눌 수 있도록 뽑아서 클리어 파일에 딱 넣어두었다. 그리고 여분의 장비를 챙겨서 내일 갖고 갈 수 있게 박스와 가방에 넣었다. 

십만원 여에 달하는 텃밭과 농사 관련 책자의 링크를 지우고 지워서 '나의 위대한 생태 텃반' 한권만 샀거만 결국 나도 모르게 구입해버린 ‘가이아의 정원’을 읽으며 아, 올해 왕창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면서 내년의밭은 두둑을 쌓을 때부터 그림을 그려야겠구나. 열쇠구멍 모양의 두둑을..... 여기까지 지식 쌓기에 달려가다가 머리를 흔들흔들. 정신차려라...

기록이나 잘하자 하는 마음을 다지며 텃밭 농사를 행사기획처럼 하려고 하지 말것과 공부를 너무 심하게 하지 말것을 스스로에게 요구했다. 탱고도 공부하기를 멈추니 한발 더 잘 떼어졌던 것을 떠올리고 언어로 교류가 불가능한 고양이들과 몸으로 말해야 함을 배웠다는 것을 떠올리며.

그럼에도 요즘처럼 코로나로 움직임과 만남이 줄어든 나날, 손이 슬금슬금 책으로 다가간다. 올해, 내년 그 이후에도 이 책처럼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두책은 교양서적으로 읽기에도 나쁘지 않은 흥미로운 점이 있다. 자연을 어떻게 대할까 작은 텃밭에서조차 더불어 사는 상생이, 생태계 실현이 되기 위해서 가져야 할 기본지식이라던가, 마음의 태도 등. 도시 주변부에 대한 분석도 재미있다. 물론 배경이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점. 저자도 미국인이라는 차이가 있다.


나는 지독히 오래된 습의 테두리를 만나도 예전처럼 지리멸렬 나 자신에게 화를 내지는 않는다. 그냥 웃고 만다. 그리고 어떤 경우는 습을 따라가는 자신을 탓하지 않고 이기려 들지 않았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좀 피곤하면 그만이니까. 

내가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괜찮다.  


그래도 두권 밖에 안샀다는 걸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고양이들은 말없이 종이더미를 보고 있는 내가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책 읽을 때 제일 방해가 심하다.



작가의 이전글 이정희 씨, 다음 생은 엄마 이름으로 살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