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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담 삐삐 Nov 13. 2019

이정희 씨,
다음 생은 엄마 이름으로 살아!

_ 그 많은 시뮬레이션은 의미가 없었다

나의 엄마는 오랫동안 아팠다. 그리고 서서히 자신의 애고에 더 충실하게 되었다.

24년의 긴 투병생활, 엄마 인생의 1/3을 병과 같이 살았다.

가족의 병은 그 당사자의 것만은 아니었다. 엄마의 병이 시작된 시기와 IMF가 비슷하게 겹치고, 신부전증이 보험 적용이 안되던 때라 우리 집은 한 마디로 순식간에 가난해졌다.

이래저래 상황은 변했고, 나름 각자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어도 한 사람의 큰 병은 온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짐이었다. 4명의 자식은 합심 단결해서 똘똘 뭉치는 것보다 각자도생 하는 길을 선택했고, 아버지는 다행히 일이 있었기 때문에 엄마의 마지막을 지킬 수 있었다. 그 연세에 자신의 자존심은 지킨 셈이다.


언니들과 나는 24년 전 엄마가 쓰러져서 응급실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 매년 정기적으로 엄마가 돌아가시는 과정을 시뮬레이션했다. 죽음 직전까지 다녀온 적이 꽤 있었기도 하고 요양병원으로 가게 되는 그즈음 몇 년은 구체적으로 장례식까지 어디서 어떻게 얘기를 할  정도였다. 4명의 자식과 3명의 사위와 며느리는 아버지의 남매들에게 연락하면서까지 논의를 했지만 엄마의 죽음 소식을 듣고 뛰어갈 때에는 시뮬레이션 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빨리 그 현장에 도착해라의 미션과 적당한 선에서의 장례를 치를 준비와 사람들을 대접하기 위한 음식을 선택하는 것 말고는 별 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오는 사람 맞이하고 장례식장에서 하라는 대로 하고, 중간중간할 것들 상의해서 결정하고. 단순한 상태였다. 우리는 왜 그리 많은 시뮬레이션을 했던가,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였을까.


7월 도시가 불타는 여름에 엄마는 당신의 취향에 걸맞은 백중 주간에 생을 접었다. 

장례식에 더 많은 나이가 되었기에 낯설지 않았지만 내 가족의 장례식이란 다른 풍경을 내게 열어줬다.


장례식은 가부장제의 절정과 승계를 담은 핵심적인 의례였다. 부모세대에서 아들대로 이어지는 것은 딸보다 며느리를 의례의 독무대로 끌어내어 책임을 넘기고, 장손으로서 나이 많은 외손주가 있어도 어린 장남의 아들에게 독무대를 주면서.. 보아라 사람들아 이 아이가 이 집안의 다음 주인이며, 아이야 너는 이 집안의 대를 잇는 가부장이 되는 것이다라고 무게를 안긴다. 

현대 사회에서 장례식의 이런 해석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하겠지만 현상은 안 그렇다.  엄마의 입관식이 끝나고 종손으로 무대에 등장한  남동생의 장남, 12살 꼬마 종손은 부쩍 자기가 맡은 역할을 책임지려 노력했다. 의례가 갖는 힘은 무의식과 연결이 된다. 그 꼬마가 무슨 생각이 있었어 그랬을까, 가부장의 무게가 그저 어깨로 옮아온 것이다. 

장례식 내내 쪼개져 들어오는 의례의 의미들과 상징, 친척들의 술추렴과 아버지의 술, 간간히 문화가 다른 다른 가족이 주는 성가심이 온전히 엄마와 이별하는 시간을 방해했다. 엄마와 내가 애착관계가 깊었던 것은 아니나 측은한 마음과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아이 키우며 고집불통 남자와 살다 생을 마친 나의 엄마와의 이별할 시간은 장례식에서는 없었다. 


엄마가 생전에 절에 그렇게 열심히 다니고 열정을 쏟은 이유를 엄마가 돌아가시고서야 한순간 깨달았다. 장례식의 가부장의 행렬 끝에 엄마가 허 씨 집안 누구가 아닌 엄마의 이름 세 글자 ‘이정희’라는 이름으로 온전히 사람을 만나고 신을 만난 유일한 공간이었다. 왜 몰랐을까. 그동안..
엄마가 사랑한 신라의 암자(선덕여왕이 피접 하던)에 엄마의 마지막 흔적을 두고 돌아서니 엄마 영정 빛깔이 환해진 것 같았다. 언니들도 다 그렇게 느꼈다고 해서 모두 신기해했다. 우리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엄마가 젊은 시절 동네 여인들과 힘 모아 만든 보덕암 약수터(용왕전이라고 이름 붙였더라)에서 물 한 모금 마시고, 어린 시절 엄마에게 끌려서 울면서 왔다가도 산에서 노느라 집에 가자고 하면 울면서 갔던 기억이 났다. 위험한 산길에도 엄마는 우리끼리 놀도록 놔뒀는데, 사고 한번 없었다. 생각해보면 어른이 없고 험함 길, 위험 자체가 나 스스로를 지켜줬던 것 같다. 


엄마와의 작별은 보덕암에서 조금, 서울 와서 길상사에 내 돈으로 치르고 올린 이름 세 글자로 시작했다. 엄마는 시부모님의 49제를 참 정성스럽게 치렀는데 그걸 자식에게 받기는 어려운 일이다. 

생각해보니 엄마가 커피를 참 좋아했다. 엄마와 카페를 자주 가서 다정하게 지냈을 리는 없지만 신장 관련 질환이 아니었으면 간간히 집에 갈 때 좋은 커피 원두 선물했을 텐데, 근처 카페라도 가서 커피 한잔 같이 마시고 그랬을 텐데. 지지고 볶고 싸우더라고 결국은 아마 그랬을 것이다. 내가 커피를 마실 즈음부터 엄마는 마시지 못하게 되었으니 우리는 마주 앉아 커피 한잔 마시지 못했다. 엄마 돌아가시고 49일 완전히 안녕할 때까지 매일 커피와 차 한잔 드렸다. 긴 투병은 엄마와 나 사이 애달프고 슬픈 이별의 눈물보다 고생했네 엄마 이제 안녕의 마음이 더 컸다. 


엄마가 열심히 다니던 그 절에서, 길상사에서, 집에서 내가 기도한 내용은 딱하나였다.

6살에 부모를 잃은 나의 엄마. 따뜻한 집안에 다시 태어나 오래오래 엄마 옆에서 살아서 사랑을 주는 부모를 만나서 사랑받고 사랑하다 다정한 남편 만나고, 다정한 자식들에게 존중받는 한 생애를 사시길.. 혹은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혼자 엄마의 생을 사는 당당한 이 시대의 여인으로 태어나시길. 남자로는 태어나지 마시길..
엄마 아프던 시절 이전의 기억이 문득문득 나는 걸 보니 애도는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했구나 싶다. 
"엄마! 안녕! 잘 가!
지긋지긋한 허 씨 집안에 눈길 한번 주지 말고 후여후여 가셔요!!!"

어린 시절 놀이터이자 엄마의 최애 장소인 '보덕암', 엄마와 안녕한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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