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자신의 뇌가 저지르는 속임수의 희생자들이다. 우리 뇌는 순간적으로 색깔과 사물, 기억, 신념, 선호를 만들어내고, 이야기를 지어내며, 합당한 이유를 술술 뱉어내는 멋진 즉흥기관이다. 사실 우리의 의식적 생각이란 단지 반짝이는 표면에 지나지 않지만, 뇌는 이러한 생각이 순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색깔과 사물과 기억과 신념, 선호로 이뤄진 깊은 내면의 바다에서 끌어올린 것이라고 우리를 속이는 매력적인 이야기꾼이다. 마음 속에 숨겨진 미리 형성된 신념과 욕망, 선호, 태도, 심지어 기억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은 평면이다. 그 표면이 그곳에 존재하는 전부다. -생각한다는 착각, 닉 채터
자기계발의 시대의 화두는 자아다. 2005년 인도 아루나짤라의 마하리쉬 아쉬람을 매일 찾던 기억이 난다. 마하리쉬는 자아는 찾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닉 채터는 그의 책 <생각한다는 착각>에서 나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는 내면의 깊은 자아같은 건 없다고 말한다. 살아생전 예수의 모습과 가장 비슷할 것이라고 한 마하리쉬나 심리학 대가의 결론은 <자아를 버려야 삶의 희망이 생긴다>통하는 듯 하다.
책의 핵심 내용은 인간에게는 깊은 내면의 자아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것은 내면 자아의 소산이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에 반응하고 해석하는 표면적인 상호작용의 결과가 자아라고 느끼는 나의 실체라는 것이다. 외부의 정보와 그것을 해석하는 뇌의 반응이라는 상호작용이 잘 이루어져 새로운 정보를 발견하고 자기화하는 과정을 교육이라고 말한다. 학교에서 여러 학생들을 대할때마다 학생들의 마음을 여는 일이 가장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알든 모르든 관심이 있던 없든 학생들에게 전달되는 외부의 정보에 대해 궁금해하고 관심을 가지는 동기부여의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은 참 어렵다. 교과과목의 지식과 정보든, 함께 하는 활동이든 간단한 전달사항이든 학생들에게 정보를 전달해 그들의 마음에 닿게 하는 일은 어렵다.
학생들이 외부의 정보(수업과 세상)들에 대해 냉소, 무관심, 거부의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들의 뇌가 즉흥적인 판단을 하기 때문이다. 학생뿐 아니라 성인이나 어린 아이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뇌는 외부의 정보에 대해 쉴 새 없이 판단한다. 싫다, 좋다, 짜증난다, 의미없다, 재미없다라는 판단을 직관적으로 내리고 그렇게 내려진 뇌의 즉흥적인 판단에 따라 행동이 결정된다. 직관이라 부르든, 편견이라 부르든 그 즉흥적인 판단의 원흉은 바로 자아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가치를 알아 나가는 과정이 교육인데, 자아가 배움의 기회를 원천적으로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자아를 무기력, 무관심이 지배하는 편향의 개구멍으로 만든 것이 학생 스스로의 잘못인지, 학교와 사회의 잘못인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때그때의 즉흥적인 판단의 결과로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무겁게 받아들이면 좋겠다.(그렇다고 결정과 행동을 주저해도 안되겠다. 더 나은 삶을 만드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시도와 성찰이므로)
자신의 입장 또는 관점에서만 상황을 판단하는 자기중심적 성향(egocentric), 자신을 남들보다 높이려고 하는 자기 고양적 성향(egotistic), 자신의 안위와 이익만 생각하는 자기본위적 경향(egoistic)은 삶과 사회에 다양한 문제를 일으키는 가장 큰 원흉이기 때문이다.(마크 R. 리어리)
학생들이 아무 생각이 없어서 관심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오해인 것 같다. 오히려 자신의 입장에서는 잘못 해석된 너무 많은 생각 때문에 자아가 너무 커져 문제인 것 같다. 어른도 그렇듯 자아의 강도와 편견의 강도는 대체로 비례한다. 자기계발의 시대에 자아가 삶을 방해할 정도로 지나치게 비대해지고 강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결말에는 모든 인물들이 사라지는 허무한 영화처럼 승자독식의 기초 위에 세워진 자기계발의 붐은 나와 세상 모두를 무너뜨릴지도 모른다. 나의 가능성이 아니라, 우리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교육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