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리쉬와 닉 채터
그때는 마하리쉬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 마하리쉬 아쉬람에 간 것은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인연 닿는대로 움직이다 아루나짤라에 도착했다. 인도의 아루나짤라는 마하리쉬가 살다 간 곳이다. 아쉬람에 들어서면 아무 이유없이 마음이 치유되고 몸과 마음이 평화롭고 행복해졌다. 타임머신을 타고 2000년전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살아가는 모습을 곁에서 보면사 마하라쉬의 모습과 비슷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우연인지, 착각인지, 기적인지, 아직 우리가 모르는 뇌의 작용인지 알 수 없지만, 마하리쉬를 멀리서 보기만 해도 고통에 시달리던 한순간에 행복해졌다는 일화들은 셀 수 없이 많다. 그가 죽은지 수십년이 지난 그 공간에서 단지 머무는 것만으로도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 느낌이 지속되는지, 확인하고, 느낌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아쉬람에 매일 갔고, 갈때마다 같은 경험이 반복되었다.
마하리쉬 아쉬람도 입구에서 신발을 벗어야 했다. 신발장 같은 것은 없다. 아쉬람 전체가 개간된 숲같은 정원이고 바닥은 흙이다. 입구 흙바닥 한 켠에 방문자들의 신발을 벗어 놓고 맨발로 아쉬람 여기저기를 거닐었다. 그러던 어떤 하루, 점심을 먹으러 나가려는데 내 신발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선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오가는 평화로운 공간에서 신발을 도둑맞은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온갖 상상이 꼬리를 물었다. 다 비슷비슷한 샌들이지만 Made in Korea라는 원산지 표시가 적인 내 신발만 작정하고 훔쳐간 것일까? 누군가 피치못할 이유가 있어서 잠시 빌려간 것일까? 혹시나 싶어 맨발로 한 참을 기다렸지만, 내 신발 소식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서서히 현실을 인지했다. 여긴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곳 인도잖아.
맨발로 아쉬람을 걸어나와 가까운 신발 가게가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방향을 잡고 신발가게로 향하는 내내 눈에 들어오는 건 다른 사람들의 발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신발을 신었고, 어떤 사람들은 맨발이었다. 인도는 지방이나 시골로 갈수록 맨발로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그 전에는 맨발로 다니는 사람들을 보아도 건성으로 넘겼는데, 내가 맨발이 되고 보니 맨발로 다니는 사람들과 마주칠때마다 야릇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같은 맨발인데도 처음에는 저들과 나는 다른 사람이니 나는 신발을 신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발가게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훨씬 멀었다. 가는 길에 수많은 맨발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와 저들은 다르다는 생각은 나와 저들은 똑같다는 동질감으로 변했다. 맨발의 느낌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잔돌을 밟거나 축축한 곳을 지날때를 제외하고는 걸을만했고, 빨리 걸을 수는 없었지만, 발바닥의 간질거리는 감촉을 통해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집밖에서는 신발을 신어야 한다는는 생각으로 단단해진 자아아가 사라지며 느끼는 해방감이었다. 드디어 신발 가게 앞에 도착했고, 가게 앞에 서서 주렁주렁 매달린 여러가지 신발을 실컷 구경만 하고 발길을 돌렸다. 맨발로 더 다니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아는 찾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와서도 마하리쉬에 관심이 갔다. 그의 책을 읽었고 국내 커뮤니티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 중 인상적인 구절은 자아는 찾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라는 메시지였다. 자존감을 회복하고, 자신의 정체성과 꿈을 찾아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토대가 자아라고 모두들 생각한다. 자기계발의 시대에 자아는 더욱 중요해진다. 마하리쉬는 자아를 버려야, 자아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오랜동안 잊고 있었던 마하리쉬 아쉬람에서의 경험과 그의 메시지가 <생각한다는 착각>이라는 책을 읽으며 새록새록 다시 살아났다. 한 명은 명상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사람들에게 눈빛만으로 치유와 평화를 전한 사람이고, 한 사람은 심리학을 전공한 이가 과학적 접근으로 인간의 생각이라는 문제를 설명한다. 그런데 이 둘의 관점과 메시지가 서로 통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뇌가 저지르는 속임수의 희생자들이다. 우리 뇌는 순간적으로 색깔과 사물, 기억, 신념, 선호를 만들어내고, 이야기를 지어내며, 합당한 이유를 술술 뱉어내는 멋진 즉홍 기관이다. 사실 우리의 의식적 생각이란 단지 반짝이는 표면에 지나지 않지만, 뇌는 이러한 생각이 순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색깔과 사물과 기억과 신념, 선호로 이뤄진 깊은 내면의 바다에서 끌어올린 것이라고 우리를 속이는 매력적인 이야기꾼이다. 마음 속에 숨겨진 미리 형성된 신념과 욕망, 선호, 태도, 심지어 기억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은 평면이다. 그 표면이 그곳에 존재하는 전부다.
책의 핵심 내용은 인간에게는 깊은 내면의 자아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것은 내면 자아의 소산이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에 반응하고 해석하는 표면적인 상호작용의 결과가 자아라고 느끼는 나의 실체라는 것이다. 외부의 정보와 그것을 해석하는 뇌의 반응이라는 상호작용이 잘 이루어져 새로운 정보를 발견하고 자기화하는 과정을 교육이라고 말한다. 학교에서 여러 학생들을 대할때마다 학생들의 마음을 여는 일이 가장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알든 모르든 관심이 있던 없든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외부의 정보에 대해 궁금해하고 관심을 가지는 동기부여의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은 참 어렵다. 교과과목의 지식과 정보든, 함께 하는 활동이든 간단한 전달사항이든 학생들에게 정보를 전달해 그들의 마음에 닿게 하는 일은 어렵다. 학생들이 외부의 정보들에 대해 냉소, 무관심, 거부의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들의 뇌가 즉흥적인 판단을 하기 때문이다. 학생뿐 아니라 성인이나 어린 아이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뇌는 외부의 정보에 대해 판단한다. 싫다, 좋다, 짜증난다, 의미없다, 재미없다라는 판단을 직관적으로 내리고 그렇게 내려진 뇌의 즉흥적인 판단에 따라 행동이 결정된다. 그때그때의 즉흥적인 판단의 결과로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은 허무하기도 하고 희망적이기도 하다.
변화하는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여 객관적으로 해석하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도록 지식과 지혜를 축적시키며 통찰을 쌓아가야 하는데, 정보와 내가 만나기도 전에 자아라는 문지기가 섯부른 판단으로 아예 들어오지도 못하도록 막고 있는 형국이다. 자아가 삶을 방해하는 꼰대의 알고리즘이다. 국가를 운영하고 행정부와 법체계처럼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알고리즘 같은 내면의 체계인 자아라는 것이 없다는 주장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내면의 실체같은 자아같은 것은 실제로 없고, 그때그때 외부의 정보와 상호작용하는 뇌의 태도와 해석이 나의 전부라는 말은 지금 우리의 뇌, 우리의 삶이 어떤하더라도 그때그때 정보를 대하는 방식을 바뀐다면 우리의 생각, 우리의 삶은 그에 따라 바뀐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하리쉬와 <생각한다는 착각>의 저자 닉 채터와 마하리쉬의 메시지는 "자아를 버려야 우리 삶에 희망이 생긴다."하나의 문장으로 압축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