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

by 피라


<몰입의 즐거움>이라는 책을 처음 읽은 건 회사 기숙사 생활을 할 때다.


하루 12시간만 일하는 것이 소원이었던 첫 직장 시절. 대부분 일요일에도 일해야 해서 집에도 못 가고, 한 주 동안 지친 몸과 정신을 기숙사 침대에 벌러덩 던지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토요일 오후 4시, 탈진의 시간. 긴 한 숨을 쉬고 난 뒤, 그때야 비로소 밀려오는 질문들. 나는 누구인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가?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


밀려오는 생각들에 답은 없었다. 내일도 어김없이 출근하고 정신없이 일하는 시간만 쓰나미처럼 밀려올 뿐. 뭔가 근사하고 구체적인 대안을 생각할 능력도 여유도 없었다. 그러다가 결심한 것이 책읽기였다. 일단 좀 알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 뒤로 책을 많이 보았다. 스콧니어링 자서전을 보고 채식을 시작했고, 언제나 소금에 절인 야채 같은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술, 담배, 커피도 끊었다. 몸과 정신이 맑아져서 새벽에 3시~4시에 저절로 일어나게 되었고 책을 더욱 많이 보았다. 일 년 동안 200권은 본 듯하다. 그 시절에 본 책이 미하이 칙센트 미하이의 몰입의 즐거움이다.


몰입의 즐거움은 그때 읽었던 많은 책들 중에서 기억 남는 책이다. 별 새로운 내용은 없었지만 강렬했다. 그의 책을 보고 깨달았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나라는 인간이 몰입할 수 없는 일이구나라는 걸. 그래서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몰입하는 삶을 찾아 떠났다. 20년이 지난 지금 의문이 생긴다. 그때는 일에 대한 이해의 깊이와 폭이 부족해서 일에 몰입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문제를 정의하는 방법부터 잘못된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내가 맡은 일만의 문제일까? 내 삶도 일과 같은 것은 아닐까?


아이와 학생을 만나고, 취업준비생들을 만나고, 힘겹게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이 몰입하는 삶을 산다면 대부분 문제가 해결될테다. 학생들은 성적이 쑥쑥 올라가고, 직장인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출근할 거다. 무엇보다 사는 게 재미있을 것이다. 몰입의 동기와 몰입의 과정과 몰입으로 추구하는 목표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서로 도운다면 삶은 참 신나고 행복할 것 같다.


교육의 문제는 몰입의 문제다. 진로 선택의 문제도 내가 얼마나 그 일에 몰입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몰입 정도에 따라서 과정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단순히 백화점에서 물건을 고르듯, 진로와 직업을 선택하는 것으로 끝날 문제는 아니다. 진짜 문제는 선택 다음이다. 그 선택의 결과로 내가 감당해야 할 시간, 즉 일을 어떻게 하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아무도 나의 제대로 일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직장에서도 일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업무 수행방법이나 과정을 알려주는 것만으로 일 속에 담긴 진짜 의미와 가치를 알기는 힘들다. 그걸 알게 된 운이 좋은 사람들은 몰입의 경험을 하고 일을 통해 성취하는 삶을 산다. 일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삶에 대해 알아나가는 것과 비슷하다. 소풍갈 때 도시락을 준비하고, 트레킹을 떠날때 기본적 것을 숙지하듯 학생들이 졸업 후 사회에서 각자의 일을 할 때 도움이 될 일에 대한 앎이 있으면 좋겠다. 자신의 일을 통찰할 수 있는 힘이 있으면 몰입의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커지기 때문이다. 몰입을 해봐야 그 일을 계속할지 그만둘지 안다. 몰입의 경험은 진로 선택의 힘이 된다. 일에 대한 앎은 몰입에 대한 안내서다.


몰입의 즐거움을 말했던 미하이 칙센트 미하이는 2021년 10월 20일에 생을 마쳤다. 오래 전, 룸메이트가 깰까 숨죽이며 기숙사 침대에서 읽던 그 책을 찾아봐야겠다. 먼지 쌓이고 뒤틀린 그의 책을 다시 읽어야겠다. 나 자신에게, 타인들에게 몰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겠는지 돌아봐야겠다. 오늘 하루 몰입의 시간을 생각해야겠다. 몰입은 어느 순간 우연히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피트니스처럼 체력과 근육을 키우는 일 같다. 아는 것은 하는 것을 돕지만, 하는 것은 아는 것 만든다. 몰입은 아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


20년 전 토요일 오후, 방전된 상태에서 기숙사 침대에 누웠을 때 정체성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나의 정체성 그건 바로 진로 고민이었다. 어떻게 살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죽는 순간까지 계속된다. 미하이 칙센트 미하이도 그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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