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by 피라



지난 10일 동안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날을 보냈다. 지난 주 초, 한 대학에서 연락이 왔다. 6시간 분량의 면접교육 동영상 만들어 줄 수 있겠느냐는 문의였다. 일도 밀렸고, 촉박한 일정이라 거절하고 싶었는데, 나도 모르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내게 동영상 제작이란 발리에서 스키장을 만드는 일, 문과생이 하루 만에 인공위성을 만드는 일이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난 재난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걸 어렴풋이 알아차렸고, 해맑은 무지함으로 사태를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면접에 대해서는 언제 어디서나 즉흥적으로 쉬지 않고 최소 60시간은 말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동영상 제작을 너무 쉽게 본 것 같았다. 콘텐츠가 있다는 것과 콘텐츠를 제작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어디서 찍을 것인가? 어떻게 찍을 것인가? 편집은 무리니, 한 방에 찍어야 했다. 그럴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한 일인가? 카메라를 켜 놓고 강의 하듯 말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나를 자책하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기획하고 PPT를 만들며 촬영 준비 작업을 했다. 찍는 게 다가 아니었다. 후반 작업이 필요했다. 아무리 바로 보낼 수 있는 오리지널도 최소한의 편집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살기 위해서는 밥을 먹어야 한다. 편집은 밥이었다. 다급한 마음으로 편집 프로그램을 검색, 학습, 실행해 어설픈 편집본을 만들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용량이 너무 커서 파일 송부가 될 만큼 줄이느라 씨름했다.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다. 드디어 학교에 보냈고, 잘 받았고, 고맙다는 답장이 왔다. 다음 날, 학교 시스템에 2기가 이상은 업로드가 안된다고 파일을 2기가 미만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 줄이고 줄여 보낸 파일이 8기가였다. 어쩔 수 없이 실시간으로 추가 편집 기술을 배우며 이리 붙이고 저리 붙이며 2기가 미만의 영상을 4개 만들어 보냈다. 정말 고맙다는 답장을 받고 한 숨 돌렸다. 지구온난화 때문에 많은 현상이 일어난다. 혼자 힘으로 발리에 스키장을 건설한 기분이 들었다. 어떤 이들에겐 숟가락질보다 가벼운 일이 어떤 이들에겐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진다. 숟가락질은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처음엔 그랬다. 바쁘게 살다 보니 아기 시절을 기억 못할 뿐이다.




다음 날 내가 변했다는 걸 알았다. 4일 안에 3시간짜리 4개 파일을 또 촬영하고 편집해서 보내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콘텐츠를 배치해 흐름을 만들고, PPT를 만들고 촬영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자꾸만 동영상 편집을 가르쳐주는 영상만 찾아 공부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어쩔 수 없이 시작한 일인데, 하다 보니 은근히 재미있다. 편집도 재미있고 나의 모습을 확인하며 정의하는 것도 재미있다. 거울도 잘 안보고 사진 찍기도 싫어하는 터라, 처음에는 나를 보기 싫었는데 자꾸만 보고 또 보니 내가 업무의 객관적 대상이 되어 나를 인지하는 확증 편향이 줄어가는 것도 재미있다. 여러모로 배우는 것이 많다. 동영상 편집 때문에 생긴 변화다. 무엇보다 동영상 편집의 즐거움을 아는 몸이 되었다.




횟수로 3년이 되었다. 유튜브를 해야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한 지가. 관련 책도 몇 권 보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고민은 많이 했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생각과 실행은 별개의 문제다. 새로운 시도가 여러모로 삶을 나아가게 한다는 걸 알지만, 그걸 하는 사람은 언제나 소수다. 세상은 아는 사람의 몫이 아니라, 하는 사람의 몫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편집이라는 행위를 하게 되었고, 그 행위로 인해 나의 앎이 변하고 행동이 변했다. 이번 좌충우돌의 경험이 없었다면 난 30년 뒤 요양원에서 쓸쓸하게 눈내리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여전히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튜브를 시작해 볼까?......'




삶은 Knowing과 Doing의 상호작용이 빚어내는 결과다, Doing의 과정을 통해 Knowing이 재구성된다. 재구성된 Knowing에 의해 Doing이 다시 재구성된다. 너와 나의 상호작용, 나와 세상의 상호작용, 앎과 행동의 상호작용이 각자의 삶을 빚어내고 세상을 빚어낸다. 상호작용은 지속적이어야 한다. Knowing과 Doing이 활발히 의사소통하는 상호작용이 멈추는 때가 바로 그때다. 꼰대가 되는 때.




그리고,


학생들을 생각한다.


어떻게 해야 그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교육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Doing과 Knowing의 상호작용의 즐거움을 알게 할까?


어떻게 해야 그런 교육이 그들 삶을 더 낫게 만들고 있다는 믿음이 생길까?


하나는 알 것 같다.


내가 그런 삶을 살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적어도 그런 삶을 향해 걸어가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걷는 자만이 걸을 수 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해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