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돌아가신 구순의 큰 이모는 기억력이 탁월했다. 수십 년 전의 일도 이모는 항상 이런 식으로 말했다.
"그 날은 1996년 12월 15일 오후 3시쯤이었어. 눈발이 살짝 날리다 그쳤어. 그 애는 분홍색 블라우스, 곤색 바지에 하얀색 운동화를 신었는데, 왼쪽 신발끈이 풀려 있었어. 갈색 가죽 지갑을 열어 돈을 보여주는데 3만 2천 500원이었어......"
엄마도 가족들이 구입한 모든 물건들의 구입 시기와 가격을 다 기억할 정도로 기억력이 좋았다. "엄마 이거 얼마였지?"라고 물으면,
"그거? 15만 5000원, 2001년 3월 19일에 롯데백화점에서 샀잖아. 그때 세일 한다고 해서 같이 산 3만 5천원짜리 유리 그릇은 이가 나가 이 집 이사 올 때 놔두고 왔네. 7년 썼으니 썩 아깝지는 않지 뭐."
엄마 쪽 유전인지, 나도 기억력이 좋았다. 시험 범위를 스윽 한 번 읽기만 하면 좋은 점수가 나왔다. 엄마와 이모는 80살이 넘도록 탁월한 기억력을 유지했는데, 난 30대부터 기억력이 점점 쇠퇴했다. 책을 읽다가 덮고, 다음 날 어제 읽은 부분을 보면 처음 읽는 것 같은 새로움. 뭔가 할 일이 있어서 컴퓨터를 켰는데, 부팅화면을 쳐다보다가 왜 컴퓨터를 켰는지 잊어버리기. 필요한 물건을 사고 난 후에 이미 같은 물건을 샀다는 사실을 깨닫는 발견의 삶. 기억력 감퇴의 사연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한해 한해 상태가 더 나빠지는 것 같다.
평생 대학에 계셨던 장인 어른과 밥을 먹다가 기억력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인간의 두뇌는 깨진 독과 같다고 하셨다. 독이 깨어졌으니 물을 부으면 물이 빠져나가는 것은 당연하다 하셨다. 그런데 독에 물을 채우는 방법이 있단다. 빠져나가는 물보다 더 많은 양의 물을 독에 부으면 독은 물로 가득 찬단다. 기억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반복 학습을 하면 된다는 뜻이다.
동작 하나를 익히기 위해 수년 동안 연습을 반복하는 운동선수처럼, 살아가면서 꼭 기억하고 싶은 것을 위해 수 없는 반복 학습을 한 적이 있는가 싶다. 머리가 좋다는 이유로, 머리가 나쁘다는 이유로 살아가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을 흘려 보내기만 한 것 같다. 머리에 남아 있으면 나의 운명, 기억에서 사라져도 나의 운명이라는 태도로. 수없이 쓰러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몸을 단련하는 운동선수를 생각하면 머리를 방치한 것 같아 뇌에게 미안하다.
기억력 향상에 직간접적으로 도움 된다고 하는 것은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수면과 운동으로 알고 있다. 몸을 움직이는 것과 삶은 여러모로 많이 연결되어 있는 듯 하다. 아이가 걸음마와 젓가락질을 배우듯 삶에 필요한 새로운 생각을 머리에 담기 위해 나는 얼마나 노력했을까? 배움의 전제 조건은 모른다는 걸 아는 것이다. 아직 살아있고, 모르는 것이 많고, 감퇴된 기억 덕분에 저장 공간도 넉넉하니 얼마나 다행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