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영도라는 섬에 이사 온 지 20년이 훨씬 넘었다. 육지 사람들은 영도를 무시했다. 나도 그랬다. 대학시절 영도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친구를 만나면 파래 따다가 왔냐며 놀리기도 했다. 6.25를 기점으로 영도 일대에 부산 인구의 3분의 1이 거주했던 적도 있는 한국사의 중심이기도 했지만, 섬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영도는 무시와 놀림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97년에 영도 봉래산 중턱으로 이사를 왔다. 섬의 주민이 되어 살아보니 영도는 참 좋은 곳이었다. 부산에서 유일하게 매가 서식한다는 봉래산, 아름다운 바다 풍경, 맑은 공기, 아침마다 동네 구석구석 지저귀는 새소리, 황혼의 시간을 맞이한 쇠락한 구도심의 구불구불 꺾인 골목길을 따라가며 앞으로 펼쳐질 내 인생의 장면들을 상상했다. 상대 정당은 무조건 싫어하는 정치인처럼 영도를 무조건 무시했던 나는 영도를 사랑하게 되었다.
봉래산은 나의 은사다. 퇴직 직후 어떻게 살 것인지를 생각하며 매일 봉래산 여기저기 좁은 흙길을 걸었다. 갈래길을 따라 본능적으로 올라갔고 다시 집으로 내려왔다. 봉래산 정상 할매 바위 뒤편 경사진 절벽에 앉아 눈 아래 펼쳐진 빡빡한 도시 풍경을 바라보며 앞으로 내디뎌야 할 인생 길을 물었다. 영도 봉래산을 오르내리던 연습 덕분에 홀로 비맞으며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까지 거뜬히 올랐다. 놀리고 무시했던 대상이 내 삶을 이끌고 품어주었다. 요즘도 여전히 봉래산이 기지개를 펼 때 일어나고, 봉래산 자락이 어두워지면 잠자리에 든다.
장난이긴 했지만, 오래 전 영도 사는 친구들을 놀리던 그때는 영도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아는 바가 없으니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한다. 근거없는 생각과 믿음으로 의미없는 행동을 한다. 무엇보다 다수의 생각을 나도 모르게 따라간다. 나라는 존재감은 그렇게 나도 모르게 굳어간다. 무지와 편견의 콘크리트로 굳어진 정신적 느낌을 나라고 믿는다. 나의 믿음, 나의 생각을 돌아보며 사실과 다를 수 있다는 태도를 가지지 않으면 편향이 확대된다. 편향이 확대되면 가치관이 되고, 신념이 된다. 신념은 삶을 일으키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한다. 삶을 도왔던 신념이 상황에 따라 삶을 공격하기도 한다.
학생과 청년들이 자신들의 진로를 생각할 때 가끔 영도가 오버랩된다. 일단 좋은 대학을 가고, 일단 높은 스펙을 쌓으면 취업이 잘 될거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진 학생들을 보면 오래전 육지에 살면서 영도 섬과 영도 사람들을 바라보던 나의 시선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취업 이후의 문제는 업무 수행, 즉 일이다. 기업은 일을 잘할 것 같은 사람을 뽑고, 일을 잘한다는 것과 스펙과는 사실 큰 상관관계가 없다. 스펙만 높다고 일을 잘한다고 말하는 것은 쇼핑중심으로 설계된 단체 패키지 여행을 한 번 다녀온 뒤, 여행 전문가라고 외치는 것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다. 아무리 기능적 중심의 역량만 요구되는 단순반복적인 역할을 요구하는 직무도 업무 수행 당사자가 그 일을 왜 하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면 원하는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직무 역량은 업무 수행자 자신 삶에 대한 이해라는 토대 위에서 길러진다. 삶이 흔들리면 일도 흔들린다.
교육이 무너지고(혹자는 공교육은 벌써 무너졌는데, 입시 사교육이 이를 지탱하고 있는 형국이라 말하기도 한다.), 대학이 무너지고, 학생과 취업준비생들의 삶이 무너지고 있다. 원하는 직업의 일을 얻지 못할거라는 초조함과 불확실성으로 흔들리는 삶을 안정적으로 만드는 일은 지진에 대비한 건물을 짓는 것과 같다. 외적 변수에 마구 요동치는 삶을 설계할 것이 아니라, 외적 변수에도 안정적인 삶을 설계하는 일이다. 사회 시스템이 흔들리는 힘든 시기에는 내진설계하는 삶을 만들어가야 한다. 내진설계는 기존의 구조물을 해체하고 기초를 다지는 일부터 시작된다. 기존의 생각에 스스로 의문을 품고 자신의 믿음을 해체하는 것,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품고 다양하게 살아가는 타인의 삶을 깊고 넓게 이해하는 것. 그 과정에서 스스로 배우고 성장하는 방법을 알아가는 것. 그렇게 형성된 지식과 정보, 생각과 신념을 다시 반복해서 회의적으로 돌아보는 것. 그런 연습 과정이 일단 스펙을 쌓는 것보다 기업에서 요구하는 진짜 직무역량을 키우는데 훨씬 도움이 된다.
불안정한 시대에는 안정성에 대한 욕구가 많아진다. 대부분의 학생들과 청년들이 공무원, 공기업, 대기업에서 일하기를 바라는 것은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기 때문이다. 인생을 좀 살아본 사람은 안다. 삶의 안정성이라는 것은 물리적 조건이나 외부 환경보다는 정신적 상태의 문제라는 것을. 안정적인 직무 수행도 마찬가지다. 가졌던 가지지 못했던 물리적 조건과 경제적 조건이 한 사람의 삶 전부를 결정하는 것만큼 삶에서 비극적인 상황이 있을까 싶다. 세상이 어디로 흘러가든 적어도 교육만큼은 인간을 구성하는 조건적 가치가 아니라, 인간 자체의 가치를 발견하고 키워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이상적 관점이 기업에서 요구하는 직무 역량을 갖춘 인재의 전제 조건이다. 나는 믿는다. 교육의 가장 이상적인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기업에서 요구하는 가장 현실적인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고. 어느 날 갑자기 순진한 영감에 의해 불쑥 만들어진 믿음은 아니다. 기업에서 수천명의 지원자를 만나보고, 학교에서 수만명의 학생들을 만나보며 오랜 세월 깎여진 생각이다. 살아보지 않으면 모른다. 섬과 육지가 어떻게 다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