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by 피라


해발 800미터인 금정산은 부산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24살의 어느 가을 날, 친한 동생이 함께 금정산에 오르자고 했다. 동생의 친구는 스페인 대사관의 딸인데 금정산에 오르고 싶다 해서 같이 가지고 한 것이었다. 또한 스페인 친구에게 좋은 이야기도 많이 해주기를 바랐다. 내가 고등학교 때 국어와 영어를 매우 잘했다는 걸 아는 동생은 나의 영어 실력을 믿었다.


약속은 했지만, 너무 걱정스러웠다. 난 영어 시험 점수는 좋았지만, 외국인과 영어로 대화해 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약속을 취소할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스피치 영어 학원을 다니고 있는 친구에게 연락해 함께 등산을 가자고 했다. 그래서 4명이 금정산을 올랐다.


금정산 아래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 산을 오르고, 정상 아래 들판에서 점심을 먹고, 쉬었다가 다시 하산을 하기까지의 4~5시간의 그 날 기억을 잊을 수 없다. 나는 스페인에서 온 친구와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내가 데리고 온 친구는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영어를 곧잘 했다. 친구가 나보다 영어를 잘하는 모습을 보니, 부끄러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도 말해야지, 나도 말해야지..' 하면서 머리 속으로 상황에 맞는 완벽한 영어 문장을 생각하며 망설이고 망설이다 결국 하루 종일 묵언 수행을 하고 말았다. 그 날 스페인 친구는 하멜 표류기에 등장하는 전혀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순수 조선인을 만났다고 일기에 썼을지 모른다.


3년 뒤 긴 배낭 여행을 떠났다. 영어에 관해 하나 배운 것이 있다면, '언제든 영어로 대화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였다. 여행을 통해 나는 영어로 대화하는데 어려움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서 브로큰 -잉글리쉬가 더 많지만 영어로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과 온갖 이야기를 나누고, 공식 행사에서 동시 통역도 하고, 비즈니스도 할 수 있었다. 한국에 두 번 방문한 폴 콜먼이라는 환경운동가가 있다. 19년 동안 4만 7천킬로를 걸으며 나무를 심었던 사람이다. 그 친구가 부산에 처음 도착했을 때 통역을 맡았고, 이후로 친한 친구가 되었다. 훗날 그는 나에 대해, "한국에서 만난 사람 중에 유일하게 영어로 유머를 멋지게 구사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한다. 3자로부터 들은 칭찬은 형편없는 내 영어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언제든 보여줄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영어로 생각하고 영어로 말하면 생각의 본질에 다가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영어의 언어적 특징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모르는 단어가 많고, 영어로 구사할 수 있는 표현의 한계 때문에 머리 속의 복잡한 생각을 쉽고 단순한 단어 몇 개로 핵심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어로 생각을 표현하면 필연적으로 군더더기는 다 빠지고, 핵심만 남는다. 같은 생각을 자신 있는 한국어로 표현하면 핵심 내용보다 표현에 집중하다 보니 여러 개념과 내용들이 서로 뒤엉켜 풀기 어려운 실타래가 되어 버린다.


오래 동안 고민하며 한글로 정리해온 주제가 있다. 분량만 많아지고 뒤엉켜 도저히 정리가 되지 않았다. 문득 생각이 들어, 중학교 영어 수준의 단어와 문장력으로 흐름을 정리해 보았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뒤엉킨 것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사람이 뭔가 일을 도모할 때, 일의 결과물은 가지고 있는 자원의 양,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의 양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탁월한 결과물이란 군더더기가 쏙 빠지고 꼭 필요한 뼈대만 남은 상태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그걸 본질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우리 삶은 너무나 많은 정보와, 너무나 많은 선택지와, 너무나 많은 욕망과, 너무나 많은 망설임과, 너무나 많은 두려움과, 너무나 많은 진실과 가식 사이에서 너무나 많은 생각과 감정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정글 같다. 복잡한 생각과 언어로 복잡한 상황을 풀어내는 일도 필요하겠지만, 때로는 삶의 본질적 관점으로 쉽고 단순하게 풀어내는 과감함도 필요한 것 같다. 디자인도, 말과 글도, 삶도 어렵고 복잡한 것보다는 쉽고 단순한 것이 여러모로 좋은 듯 하다. 그러니 내가 가진 자원의 한계를 탓하기보다는, 내가 가진 뻔한 자원을 이용해 뭐라도 해보는 보는 것이 나와 타인의 삶에 훨씬 도움이 될 것 같다. 탁월함이란 쉽고 단순한 것이고, 본질에 가까울 수록 아름다운 법이니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