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 첫 미팅을 했다. 예비 저자 3명과 출간 기획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1시간 30분 넘게 모두가 즐겁고 진지하게 몰입했다. 큰 도움이 되는 정말 좋은 시간이었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프로젝트 진행 여부를 떠나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출간 기획자로서의 공식 첫 미팅이었는데도 평생 이 일을 해온 것 같은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했다.
새벽에 일어나 나도 모르게 여러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줄곧 이 일을 해왔다는 걸.
회사 다니던 시절인 2000년 늦가을, 운동을 마치고 시원한 밤공기를 마시며 기숙사로 들어가는 길에 결심했다. 퇴직 전에 책을 한 권 내기로. 노트북을 덜컥 샀고, 미친 듯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모니터 화면에도 썼고, 종이에도 썼다. 이듬해에 책을 내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어떤 책을 낼지 고민하며 글쓰기와 기획을 반복하며 한해 한해 보냈다. 2006년에 첫 출판 계약을 했다. 초등학생 대상 동화였다. 아이들 대상이니 쉬울 줄 알았다. 그때 알았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쉽고 재미있게 쓴다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걸. 동화작법을 공부하며 치열하게 원고를 썼고, 우여곡절 끝에 원고를 끝냈지만, 출간되지는 못했다. 내가 출판사라도 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성인에게도 맞지 않고 아이에게도 맞지 않는 어정쩡함의 극치. 내가 봐도 부끄러운 원고였으니. 그 뒤로 절치부심하며 글을 쓰며 또 다른 책들을 구상했다. 친하게 지내던 출판사 대표와 출간 기획을 하며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그가 나보고 "기획은 그만하고 글을 써라"는 말은 잊혀지지 않는다. 글을 잘 쓰기 위한 구성을 잡기 위해 기획을 하는 것인데, 허구헌날 기획만 하고 있는 모습이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 같았다.
2010년에 첫 책이 나왔고, 분야 베스트가 되었고,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2011년에도 한 권, 2012년에도 한 권 출간했다. 탄력이 붙은 것 같아, 이제부터 제대로 기획해서 정말 좋은 책을 내어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공부하며 책을 기획했다. 그때부터다. 글이 잘 써지지 않고, 기획의 늪에 매몰된 것이. 글과 수영은 똑같다. 몸에 힘을 빼야 된다. 머리로는 알아도 안된다. 입영의 요령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선 채로 물에 뜰 수 없다. 잘 안될수록 더 좋은 책을 내고 싶었고, 더 좋은 책을 내고 싶을수록 더 잘 안되는 무한반복 속에서 한국과 외국을 떠돌았다. 근 10년 동안 1년에 두어 달은 여행지에서 어떤 책을 낼 지 고민하며 글을 썼다. 여행의 목적은 단 하나, 책이었다. 여행지에서도, 일상에서도 한 순간도 출간기획과 원고를 고민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걸을 때도, 이동중일때도, 잠에서 깨자마자, 틈만 나면 생각하고 메모했다. 그 뒤로 7년간 원고 기획과 글쓰기 사이에서 절망과 희망의 세계를 오갔다. 다시는 글을 쓰지 않겠다는 결심도 몇 번 했고, 글만이 나의 운명이라는 깨달음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러던 중 꼭 나의 책을 내어야 하는가? 내가 내고 싶은 책을 남이 쓰면 되니 출판사를 하나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출판사 이름도 정하고 등록 직전에 출판업계에 있는 지인들의 진심어린 조언들을 듣고 그만두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술마시면서 버릇처럼 말했다. 나는 무언가에 미치고 싶다고, 그런 삶을 살고 싶다고.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단단한 일상을 녹여낸 시를 쓰내는 시인을 안다. 몇 해 전, 그 분이 개에게 허벅지를 크게 물리는 사고를 당해 구급차에 실려갔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솟구치는 피를 지혈하는 그 급박한 상황에서 문득 시상이 떠올라 피묻은 손으로 노트와 볼펜을 힘겹게 꺼내 시상을 메모했다고 전해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너무나 통쾌하고 즐거운 마음이 들어 나도 모르게 고생하셨다며 고기를 사드린다고 전화했다. 같은 류의 사람이라서 그랬던 것 같다. 그 분은 시에 미쳤고, 나는 책에 미친 것 아닐까? 책에 처음으로 미친 건 초등학교 3학년 겨울 방학 때다. 방학 두 달 동안 읽은 책이 200권이 넘었다. 책 읽는 것이 너무너무 짜릿짜릿 재미있어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겨울 방학을 보냈다. 하루에 평균 3권을 읽은 듯 하다. 매일매일 2, 3번씩 책 살 돈을 달라고 하니, 엄마는 제발 책 좀 천천히 읽으라고 부탁했을 정도다. 독서를 인생 유일의 즐거움으로 여겨셨던 엄마가 그런 말을 할 정도로 우리 집은 가난했고, 나는 책에 미쳤었다.
초등학교 3학년 겨울 방학. 마법같았던 그 시간처럼 다시 책에 빠진 건 2019년부터다. 낮에는 책을 읽을 시간이 없으니, 새벽 2시에서 5시 사이에 일어나 책을 읽었다. 책을 읽으며 독자, 저자, 출판사의 입장을 오가며 생각하고 메모하고 글을 쓴다. 모든 것을 떠나 책 읽는 시간이 너무 행복하다. 책은 기쁨이다. 새로운 생각, 새로운 지식, 새로운 관점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여행하는 기쁨 그 자체다. 이렇게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책을 읽으며 가치있는 책 만드는 일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순수하고 순진한 마음으로 출판업에 뛰어들었다가 상처받고 망한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다. 출판은 다이빙이다. 뛰어내려야 시작된다. 어떤 모습으로 수면과 만나 어떤 다이빙으로 기억될지는 모른다. 두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미 뛰어내렸다는 것, 이 일이 참 행복하다는 것이다. 책을 내어야겠다고 결심한 지 23년 만에 비로소 내 일을 찾은 듯하다. 지금까지의 고민하던 삶이 이 일을 하기 위한 과정이었구나라는 생각도 든다. 저마다의 삶이란 너새니엘 호손이 쓴 큰바위 얼굴의 주인공 같은 여정이 아닐까?
일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말이 좋다. 나는 요즘 일이 기쁘다. 무척 행복하다. 이 기쁨을 지속해 더 큰 가치와 기쁨으로 만들어 세상에 돌려주기 위해서는 슬픔을 알아야 할 것이다. 슬픔을 회피하고, 배제하고, 공격하고, 격리시켜 기쁨의 상태를 유지하지 않겠다. 슬픔을 끌어안고, 다독이고, 사랑하며 기쁨과 슬픔을 소개시켜 서로 이야기를 나누게 할 것이다. 슬픔과 기쁨의 만남으로 다채로운 음영이 생기야 독자들이 원하는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달을 볼 수 있는 이유는 우리 반대편 어딘가에 태양이 달을 비추기 때문이다. 슬픔과 기쁨은 달과 태양 같다. 태양빛이 없다면 달은 보이지 않는다. 타인이 없다면 나도 없다. 나와 다른 존재가 없다면 나도 없다. 모두는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비추는 빛이다.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어 기뻐하고 슬퍼하는 공간을 밝혀주는 책, 서로 다른 사람, 서로 갈등하는 이들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만드는 책. 그 과정이 기쁠수도 슬플수도 있겠지만, 기꺼이 마음을 열고 이야기는 나누려는 용기를 심어주는 책. 그런 책을 만들고 싶다. 출간을 떠나 자신들의 고민과 삶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거듭 말해주던 예비 저자들이 고맙다. 세상을 움직이는 에너지는 주유소의 기름이 아니라, 가치에 대한 공감과 열망이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상태에서 일하고 싶다. 이제 그 정도는 안다. 그래야 좋은 책이 나온다는 것을. 여기까지 23년 걸렸다. 행복하고 설렌다. 그걸로 충분하다. 인생은 결과가 남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남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