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

by 피라

퇴근길 엘리베이터 속으로 다른 기업의 여직원 두 명이 들어왔다.

둘은 웃으며 나누던 이야기를 급히 마무리 한다.


"맞아, 팀장님도 000래, 내 주위에는 온통 000야."

"재미있네...... 그래서 일하기 힘들구나..ㅎㅎㅎ"

"회사를 옮기던가 해야지...ㅋ"


MBTI 이야기다.

판단은 인간의 본능이다.

희끄무레하게 관찰되는 존재를 바라보며,

저건 위협인가? 아닌가?

피해야 하나? 다가가야 하나를 판단해야 하는 인류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많을 때는 일년에 3천여명의 면접자를 만나야 했던 한 때의 힘든 일 때문이었을까?

사람을 유형별로 나누어서 그 유형의 틀로 판단하는 태도가 불편하다.

피를 말리는 집중력으로 다양한 사람들의 유형을 나누어 판단하는 일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를 깨달은 건, 퇴직을 해서도 한 참 지나서였다.


사람을 관찰하고 판단하는 나의 능력에 대한 오만함을 떨쳐버리는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어림잡아 10년은 걸린 듯 하다.

HR 업계에 있는 사람들은 그걸 인사병이라고 했다.

인사병은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말한다.

그 중심에는 사람을 관찰하고 판단하는 자신의 생각에 대한 믿음이 자리잡고 있다.


이제는 분명히 안다. 사람은 유형별로 분석해서 그 틀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유치하고, 문제가 많은 태도인지를.


MBTI는 주관적 판단이라는 편향에 과학적 분석이라는 누구에게나 맞는 기성복을 입혀준다.

모든 인간에게 동그라미, 네모, 세모가 새겨진 옷을 입히는 것 같다.


MBTI를 싫어하는 나도 검사를 받아봤다.

정말 맞는 말이고, 정확히 분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나보다 더 잘 분석해 주어서 읽고 또 읽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다시 찾아서 읽고 싶다.

자신에 대해 알고 싶은 욕망은 아마도 가장 강렬한 욕망 아닐까?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걸 경험했으리라.


MBTI의 문제점은 "맞아!, 맞아!"라며 탄성을 자아내는 그럴듯함이다.


바로 그 그럴듯함이 MBTI의 문제다.


모든 인간에게는 수많은 성향들이 내재되어 있다.

예컨데, 대부분의 인간(모든 인간이라고 해두자)에게는

인간에게서 발견되는 모든 성향,기질, 생각, 감정이 들어 있다.

사람에 따라 A 기질은 좀 강하고, B기질은 좀 약하고와

같은 정도의 차이가 다양한 사람을 만들어낸다.

이는 고정적인 것도 아니고, 발현되는 정도는 상황과 시간에 따라 다르다.


한 마디로 말하면,

모든 사람의 안에는 호모 사피엔스에서 발견되는 모든 면들이 들어 있다는 뜻이다.

얼마나 강하게 발현되는지, 외부로 얼마나 표현하는지, 얼마나 자주 느끼는지,

얼마나 섬세하게 자신을 돌아보는지 등의 차이일뿐이다.


외향적, 내향적, 표현하고, 고집이 세고, 수용하고, 여리고, 상처받고, 자기중심적이고,

이타적이고, 현실적이고, 이상적이고, 목표지향적이고, 과정지향적이고, 공감을 중시하고,

냉정하고, 성급하고, 침착하고, 안정적인 걸 좋아하고, 모험적인 걸 좋아하고, 사교적이고,

혼자 있고 싶고, 끈기가 부족하고, 할 때는 하고.... 서로 모순되기도 하는 이런 성향이 전혀 없는

인간은 존재하기나 할까?


쪽집게 도사를 찾아가니, 다짜고짜,

"음... 외롭구나... 외로워...평생 외로울 사주야..."

라고 일갈하면, 공감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아무리 친구가 많고, 주위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도,

가끔 이것이 다 무슨 의미인지, 혼자 있을 때는 존재론적 외로움을 겪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의 공통적 본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누구나 공감하듯,

MBTI도 마찬가지다. 모든 인간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속성을 유형화해서,

무엇이 강하고 무엇이 약한지를 이야기해주니, 그럴듯하다.


"너 참 이기적이야!"라는 말을 들으면, 이기적으로 행동했던 자신의 행동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 편향적 관점이 강화된다.


아이에게,

"넌 참 너밖에 모르는 아이구나!.."라고 반복해서 말하면 아이는 자신이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믿는다. 누구나 그런 면이 있으니까.


MBTI는 편향을 강화시키는 대표적인 사례다.

인간을 간단히 유형화해 빠르고 쉽게 이해하고, 어떤 존재인지 판단하는 건,

정글에서 만난 존재가 적인지 아닌지를 즉시 판단해야 하는 시대에는 유용할 지 모르겠다.


좋아요와 싫어요가 하나의 덩어리로 뒤섞인 채, 복잡한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는

유형화의 모델은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다.

유형화가 필요한 영역은 따로 있다.

<재미있고 그럴듯한 것>과 <우리 삶에 도움 되는 것>은 서로 구분하는 것이 좋은 것처럼.


MBTI가 만들어진 곳이나, 외국에서는 혈액형 검사처럼 하물간 의미없는 검사로

취급받는 MBTI가 한국에서 유독 핫 한 이유를 다룬 책이라도 한 권 출간되면 좋겠다.

불확실하고 불안한 시대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 때문일까?

단순히 재미있어서일까? 혈액형 성격 분석의 진화된 버전일까?


최근에,

MBTI로 채용하는 기업을 보았다.

면접관 자신과, 혹은 지원자가 일할 구성원들과 같거나 비슷한 MBTI인 지원자인지 아닌지가

주요한 채용 기준이었다.

이쯤 되면, 상황이 심각하다.


일이란 문제해결의 과정이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관점, 생각, 아이디어들을

주고받는 것이 필수인데, 같은 성향의 사람들 하고만 일하겠다는 것은, 일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물론 같은 성향이더라도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고, 다른 성향임에도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성향이 다르면 관점과 태도가 다르니 때문에 확율적으로 다양한 생각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경영이란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된 조직을 하나의 목표로 향하게 만드는 일이다. 균일한 조직이 아니라, 다양성을 지닌 조직이 성장하는 사례는

일상의 택배 박스처럼 어디서나 볼 수 있다.)


MBTI는 MBTI로만 보자.

선을 넘지 말자.


친한 친구와 심하게 싸우고 나서, 속으로,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저 애의 콧구멍이 두 개인 것이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진작에 절교했어야 했는데...'

라며 모든 상황을 유형화해서 정리하는 사람이 되면 안 된다.


그런 태도는 무엇보다 자신에게 해롭기 때문이다.


삶에 필요한 중요한 태도 중 하나는,

그 무엇도 단정하지 않는 태도다.

유형화해서 단정해 미래를 규정하지 않는 태도만이 힘든 상황을 해결해 나가는 힘이다.

상대도, 자신도 유형화하지 말자.

모든 것을 유형화지 말자.

설사, 당장은 그럴듯해 보이고, 모든 것을 설명해 준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야만,

배우고, 성장하고, 변한다.

좋은 변화는 그럴듯함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자연의 모든 존재가 그러하듯,

인간도 제각각 다르다.

다양성은 차이를 만든다.

그 차이는 시시각각 출렁이며,

그때그때 달라지는 것이 인간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정적인 해석이 아니라,

변화 자체를 이해하고 변화 속에서 좋은 변화를 모색하는 지혜의 태도다.


차이에 집중하는 태도가 아니라,

각자의 차이가 출렁이며 서로 중첩되는 지점에 집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