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

by 피라


여행을 앞두고 우리는 나름의 계획을 세운다. 무계획의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도 적어도 여행을 가겠다는 계획 정도는 세우니, 계획이 완전히 없는 여행은 없을 것 같다. 2014년쯤일까? 레지턴트 과정의 싱가포르 여행자와 저녁 내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내가 만나본 여행자들 중 기억에 남는 사람 중 하나다.


그 싱가포르 여행자는 배낭 속에서 노트 몇 권을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난 지금껏 살면서 그처럼 계획을 철저하게 짠 여행자를 본 적이 없다. 5일 동안의 한국 여행의 일정이 거의 5분 단위로 촘촘하게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예컨대 서울 명동 인근의 정해진 숙소에서 숙박을 하고, 아침 8시에 아침밥을 먹기 위해 숙소에서 나와 정해진 동선을 따라 정해진 식당을 가기 위해 산책한다. 맛집이라고 알려진 A식당까지 이동 시간이 도보로 17분이 걸리고, 만약 A식당이 문을 열지 않았을 경우, 플랜 B로 B식당과 C식당이 정해져 있고, 각 식당에서 주문할 메뉴와 가격 특징 등이 꼼꼼히 메모되어 있었고, 각 식당을 오가는 정해진 루트와 소요 시간, 지나는 길에 봐야 할 것들이 빨간 색으로 지도에 표시되어 있었다. 그가 내게 하는 주된 질문은 촘촘하게 여행 계획을 짜는 중에 싱가포르에서 수집하지 못한 정보를 묻고 미쳐 고려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지 알려 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5일 동안 부산, 경주, 서울을 여행한다고 했고, 부산은 여행의 출발점이었다. 그가 어떤 여행을 했는지 나는 모른다. 계획대로 완벽하게 여행을 하며 행복했는지, 예상치 않은 변수가 생겨서 당황했는지, 우연과의 조우라는 여행의 선물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는지 알 수가 없다.


여행과 삶은 비슷하고 여행의 계획은 진로 계획과 비슷하다. 어떤 시기에 무엇을 배우고 익히고, 어떤 자격과 조건들을 갖춰 나가면 계획하는 직업을 갖게 된다는 진로로드맵같은 접근을 많이 한다. 불안하기 때문에 뭔가 그럴듯한 계획을 세운다. 계획을 세우면 안심이 된다. 목표가 절반쯤은 이미 실현된 것 같다. 계획대로만 하면 그 직업을 가지게 될까? 직업을 가지게 되더라도 그게 자신이 정말 원하는 직업일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처음에는 자신에게 맞는 직업이라고 여겼다가 지긋지긋한 일이 되어버릴 가능성은 또 얼마나 될까? 그럴듯하게 보이는 계획의 실현으로 축적된 경험들은 그 일을 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 그 직업을 가지고 그 일을 할 때, 예상치 않은 상황, 힘든 상황에서도 버티며 문제를 해결하는 힘을 가지고 있을까? 그런 생각과 행동을 해야 하는 자신만의 명확한 이유를 알고 있을까? 무엇보다 계획대로 펼쳐지는 삶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까?




우리의 교육은 이유를 찾는데 인색한 것 같다.

많은 학생들이 이유를 찾지 못해서 시도도 하지 않고, 중간에 포기한다. 이 순간에도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해 학생들이 선망하는 좋은 직업을 포기하는 어른들이 많다. 일하는 사람들 중 한번이라도 왜 여기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되물으며 퇴직을 고민하지 않은 이는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가지고 잘 살아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이유일지 모른다. 자신만의 삶의 이유, 일의 이유를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진로로드맵같은 그럴듯하게 끼워맞춘 계획 같은 것은 필요없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계획, 예측에 의존해 그런 정보에 삶을 맡기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를 찾지 못한 탓일지 모른다. 각자의 이유를 찾아내는 힘을 기르기 위해 무엇이든 배우고, 어떤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는 교육이 되면 좋겠다. 여행지에서 낯선 사람과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듯. 계획에 없는 경험을 하듯, 싫어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듯. 자신도 모르게 삶의 의욕이 생기듯.


떠나온 이유가 사라진 자리에 여행의 즐거움이 자리잡듯, 다양한 가치를 접하며 이유를 찾는 공부를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가지게 될 거라고 믿는다. 직업부터 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유를 찾다 보면 직업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의미 있는 이유는 대체로 계획에 없던 곳에서 찾게 된다. 계획은 앎에서 나오고, 우리의 앎은 언제나 부족하니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계획의 의미는 관념을 실행의 세계로 여행하게 만드는 다리 역할, 딱 거기까지가 아닐까? 그 이후는 관념과 현실의 상호작용을 통해 삶의 즐거움을 느끼는 것. 그게 일이고 삶이라는 생각. 또 다시 계획을 세우는 즐거움도 포함해서.


MZ세대들은 예상가능성을 공정함이라고 여긴다는 말을 들었다. 특정한 행위를 하면 특정한 결과가 나온다는 믿음은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중요하다.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고, 좋은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생긴다는 인과응보의 원리처럼 노력해서 실력을 갖추면 그에 맞는 대우를 받는다는 생각은 사회를 건강하게 굴린다. 하지만 아쉽게도 인생의 출력값은 입력값에 연동되지 않는다. 입력 값에 따른 출력값이 제각각 달라지는 것이 삶의 어려움이다.


계획대로 된다는 것은 입력값에 따른 예상되는 출력값이 그대로 나온다는 뜻이다. 삶을 좀 아는 사람이나, 일을 좀 아는 사람은 안다. 계획은 수정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걸, 일을 추진하면서, 삶을 살아가면서 최초에 계획한대로만 밀어붙이는 바보는 없다고. 그 결과는 대부분 처참하다는 것을. 그렇다고 아무 계획없이 사는 것도 위험하다. 나의 생각을 타인에게 말하는 이유는 표현과 피드백의 과정을 통해서 내 생각을 고쳐나가기 위해서고, 신념을 가지는 유일한 목적은 신념을 바꾸기 위한 것이다. 사람이 배우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현 상태를 알아야 한다. 현 상태를 알기 위해서는 상호작용을 해야 한다. 상호작용을 하기 위해서는 현 상태의 나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계획이란 현 상태의 나를 정직하게 보여주며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이는 일이다. 현재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알기도, 보여주기는 힘들다. 나의 소중한 생각과 계획을 세상에 보여주여 나와 다른 사람, 나와 다른 가치들로 인해 계획이 엉망이 되는 과정. 그 과정 없이 인간은 성장하지 않는다. 일의 결과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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