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에서 고산병 증세가 나타났다. 저녁 9시쯤부터였다. 숨쉬기가 힘들었고, 가슴은 터질 것 같았고, 불규칙한 심장 박동은 곧 멈출 것 같았다. 콘센트에 꽂힌 몸의 전원이 곧 꺼질듯한 느낌, 마음에 꽂힌 전원도 곧 꺼질 것 같았다. 가물거리는 의식을 부여잡기 위해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아찔해지고 흐려지는 몸과 마음을 느끼는 것조차 힘들었다. 죽어가는 느낌이었다. 몸도 마음도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순간순간 추락하고 추락해도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고산병 약도 소용없었고, 증세는 점점 심해졌다. 캠프에 상주하는 스텝에게 증상을 말했다. 내려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건 나도 안다. 먹구름이 잔뜩 낀 우기라 한 밤의 히말라야는 칠흑 같았다. 하산이 가능한지 바깥에 나가보니 50센티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진한 먹물 속이었다. 강력한 후레쉬와 일행이 있어도 하산은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난 혼자였다. 어슴프레 새벽이 올 때까지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8시간을 더 견뎌야 했다. 밤새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고갔다. 몇 번을 죽었다가 살아났는지 모르겠다. 과장이 아니다. 느낌은 분명히 그랬다.
새벽 4시 30분쯤 가물거리는 의식을 부여잡고 짐을 쌌고, 하산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기억을 더듬어 아래로 아래로 걸어갔다. 1시간쯤 지나니 사물의 경계를 흐릿하게 느낄 수 있었다.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가물가물한 의식을 놓치지 않게 애쓰며, 오로지 아래로만 아래로만 걸었다. 걷기 시작한 후 2시간 정도의 기억은 없다. 내려왔다는 기억밖에 없다. 주변 풍경은 조금씩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고 새벽이 왔고, 아침이 왔다. 고산병 증세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살아서 집에 돌아갈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산 시작 4시간쯤 지나서부터 숨을 편하게 쉴 수 있었다.
조금 살만해지자, 하산하면서 죽음과 삶, 정신과 몸, 형식과 내용에 대한 생각을 했다. 그 전에 막연하게 생각했던 죽음은 이원론 같았다. 몸이 죽거나(그러면 정신도 따라 사라지는), 정신이 죽는(그러면 몸도 전원이 꺼지는) 문제라 생각했다. 그날 내가 느꼈던 죽어가는 느낌은 그렇지 않았다. 닭이 먼저인지 알이 먼저인지처럼, 꺼져가는 몸의 기능이 정신을 꺼지게 만들고, 꺼져가는 정신이 몸을 꺼지게 만드는 상태였다. 물리적인 존재인 몸은 분명히 있고, 느낄 수 있는 정신도 분명히 있지만, 이 둘은 서로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존재한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호작용으로 존재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를 설명하는 양자역학처럼 몸과 마음은 전자와 핵의 관계 같았다. 거기에 곧 죽을지 모른다는 불확정성의 마음까지 더해지니 더욱 그럴듯했다.
그 뒤부터 많은 것을 형식과 내용으로 파악하는 버릇이 생겼다. 몸은 삶의 형식이고, 정신은 삶의 내용이다. 직업은 삶의 형식이고 직업에 담긴 가치는 내용이다. 성적, 대학, 사회적 인정, 외모, 성취, 등은 삶의 형식이고, 진실한 태도 속에서 발견하는 의미, 이유, 보람, 가치 등은 삶의 내용이다. 최저임금에 모멸감을 느끼는 직업을 가져도 그 속에 담긴 가치를 발견하라, 그런 태도를 지니면 언젠가는 성공한다는 식의 내용 중심 접근을 거부한다. 다 필요 없고, 돈 많이 받고, 사회적 인정을 받는 직업을 가지는 것, 그것이 성공이라는 형식 중심의 접근도 거부한다. 내용 없는 형식은 공허하고, 형식 없는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내용과 형식은 몸과 마음의 관계 같다. 둘 중 하나가 없으면 우리는 존재할 수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 삶의 많은 영역이 형식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 하다. 특히 교육에서 그런 모습이 많이 보인다. 성적과 대학에 치중하는 것은 형식이다. 직업의 이해와 선택에 치중하는 것도 형식이다. 스펙을 쌓고 나를 보여주기 위한 기술적 방법인 자소서 작성, 면접 기법 등에 치중하는 것도 형식이다. 내용을 키우는 방법이라고 착각하고 있을 뿐, 사실은 형식이다. 의사가 되는 것은 형식이다. 우리 교육은 의사가 되는 법에 치중하지, 어떤 의사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돈도 형식이다. 돈을 쓰는 행위도 형식이다. 통장 잔고는 삶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다. 돈을 통해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는지가 내용이다.
사람이 직업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은 직업이라는 형식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직업을 통해 느끼는 세상과의 상호작용이 만드는 내용에 달린 문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직업의 형식과 직업의 내용이 얼마나 잘 상호 작용하며 조화를 이루는가의 문제다. 장자크 상빼는 삶은 단순한 균형의 문제라는 말을 했다. 덧붙이면 <삶은 형식과 내용의 단순한 균형의 문제>인 것 같다. 형식과 내용 모두를 중요하게 여기는 교육을 하면 좋겠다. 아무리 교육을 많이 많고, 아무리 좋은 직업을 가져도 고산병 증세로 괴로워하지 않으려면 빨리 하산해야 한다. 교육이 산으로 갔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형식과 내용의 균형을 고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