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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푸르나1

by 피라



오래 전, 친한 형의 홈페이지에 달린 한 댓글을 우연히 읽었다. 그 댓글 때문에 힘들었다. 죽을만큼 고생했다. 그 댓글 때문에 사람이 어떻게 죽는지 생생하게 경험했다. 그건 고산병이었다. 스콧니어링 자서전의 번역자가 남긴 댓글이었고, 댓글의 내용은 네팔 안나푸르나에 가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짧은 글을 보자마자 뭔가에 이끌리듯 나도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하고 싶었다. 그 뒤로 안나푸르나라는 단어가 점점 자주 떠올랐다. 2년 뒤 나는 오렌지빛과 분홍빛 노을이 짙게 깔린 해질녘 길을 걷다가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붉은 체크무늬 천이 깔린 테이블에 앉아 익숙하게 달밧을 먹었다. 식당 바깥에는 네팔 아이들이 재잘거리고 있었다. 카트만두에 도착한 지 삼 주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그 마을의 이름은 포카라였다.




포카라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여행이 시작되는 마을이다. 히말라야는 눈이라는 뜻의 '히마'와 거처라는 뜻의 '알라야'로 이뤄진 말이란다. 안나푸르나는 '풍요'를 뜻한단다. 설산 속의 풍요로운 땅 정도의 뜻일까? 나의 목표는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였다. 해발 8091미터의 안나푸르나 정상 등정을 위한 베이스 캠프가 있는 곳이다. 줄여서 ABC라고 불리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의 높이는 해발 4130미터다. 비를 워낙 좋아하던 시절이라 일부러 우기를 택했다. 우기라 거머리가 많았다. 신발을 통해 거머리가 기어들어오지 않도록 목높은 등산화 끈을 자주자주 질끈 동여맸다. 숙소에 도착해 신발, 양말, 바지를 벗으면 거머리가 한 두 마리가 꼭 붙어 있었다. 어떤 날은 6, 7마리가 발과 종아리에 붙어서 피를 빨고 있었다. 그때는 모기도 바퀴벌레도 함부로 죽이지 않을 때였다. 거머리가 다치지 않게 살살 떼어내어 풀숲에 놓아 주었다.




나는 최대한 천천히 걸었다. ABC왕복은 7주일 정도 걸리는데, 경쟁이 삶인 한국 사람들은 4, 5일 만에 다녀온다 들었다. 나는 9일 걸렸다. 속도를 낼 체력도 되지 않고, 그럴 마음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혼자였기 때문에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사람 흔적 없는 히말라야에서 자칫 길을 잃으면 큰 일이었다. 가이드도 포터도 없이 혼자였기 때문에 길을 잃고 사람을 못 만난다는 건 죽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늦은 오후 또는 해질녘에 고산족이 사는 로지라는 불리는 숙소에 도착할 때마다 길을 잃지 않음에 감사했다. 나침반과 종이 지도에만 의지해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혼자 6일 동안 ABC를 향해 히말라야 산길을 걸었다. 8월 우기라 사람들 보기가 힘들었다. 간혹 내려오는 사람들과 마주쳤을 뿐, 올라가는 사람은 6일 동안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비로부터 배낭 안 물건이 젖지 않도록 넉넉한 방수 점퍼 하나만 걸친 체, 때로는 폭포처럼, 때로는 한국 장마비처럼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걷는 이국의 험한 산길은 속도를 내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더욱 천천히 걸었다. 무엇보다 고산병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최대한 천천히 고도를 높이면, 즉 최대한 천천히 걸으면 고산병이 걸리지 않는다 들었다.




6일째 되는 날 처음으로 나처럼 ABC로 향하는 사람을 만났다. 40대의 영국인 부부였다. 우린 서로 무척 반가워하며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워했다. 이야기의 주제는 비오는 우기에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는 제 정신 아닌 사람들의 심리였다. 그것도 가이드도 포터도 없이. 특히 나는 혼자라며 그들은 내가 더 대단하다고 했다. 괜히 우쭐해졌다. 다음 날 그들은 나보고 내친 김에 ABC까지 함께 가자고 했다. 나의 계획은 다음 로지에서 하루 더 자고, ABC로 가는 것이었다. 최대한 천천히 고도를 높혀야 했으니까. 난 계획대로 내일 ABC에 가겠다 했지만, 그들은 같이 가자고 졸랐다. 내가 머무려는 숙소에서 조금만 더 가면 베이스캠프고, 평원의 오솔길 처럼 쉬운 길이 많기 때문에 고산병 문제도 없다는 그런 논리였다. 6일 동안 혼자 걸었던 고독 때문이었는지, 그들의 논리가 너무 탄탄해서였는지, "워터(water)"를 "와쳐"라고 발음하는 구수한 영국말 때문이었는지, 타고난 팔랑귀라 그랬는지 모르지만, 결국 난 설득되었다. 비오는 산길을 6일 동안 혼자 걷다 보면 설사 상대가 아무리 미워도 같은 결정을 할 것 같다.




우리 일행은 그 날 오후 5시쯤 베이스 캠프에 도착했다. 베이스 캠프에는 20여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대부분 도착 한 지 며칠이 지난 사람들이었다. 안나푸르나봉을 보기 위해 베이스캠프에서 죽치고 지내며 하늘이 맑아지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1주일 넘게 베이스캠프의 하늘은 먹구름으로 덮혀 있었단다. 도착 후 1시간쯤 뒤였다. 캠프 숙소 안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바깥에서 비명과 함성 소리가 들였다. 사람들이 뛰어 들어와 빨리 나오라고 했다. "하늘이 열렸다!"며 빨리 다시 사라지기 전에 안나푸르나봉을 보러 나오라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재난 영화 탈출 장면처럼 베이스 캠프의 모든 사람들은 바깥으로 뛰쳐 나와 하늘을 보았다. 모두들 말이 없었다. 마침 해질녘이라 모습을 드러낸 안나푸르나봉은 오렌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잠시 잠시 사진을 찍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아무 말도 않고, 고개를 들고 안나푸르나봉만 바라봤다. 끝까지 남은 사람들도 몇 명 있었다. 나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그때의 끝이란 안나푸르나봉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였다. 드리워지는 어둠에 하늘과 산의 경계가 사라질때까지.




경계란 서로 다른 존재가 만나는 지점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기적처럼 펼쳐진 산과 하늘의 경계를 경이롭게 바라보고, 점점 옅어지는 경계로부터 퍼져 나오는 어둠이 하늘의 모든 경계를 사라지게 만드는 광경을 본 그날 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나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경계를 보았다. 삶과 죽음의 경계. 고산병이었다.




P.S : 똑같을 순 없겠지만, 그날 본 안나푸르나봉은 대략 이런 느낌이었다.


안나푸르나.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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