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KFC

by 피라


IMF 이듬해인 1998년은 환율이 1,800원에서 1,400원 언저리로 내려가며 점차 안정화되던 시기였다. 하지만 높은 환율로 해외 여행은 엄두를 내기 힘든 때였다. 그때쯤 프라하에 3주 정도 머물렀다. 그 당시 프라하는 물가가 무척 쌌다. 궁금해서 그때 여행 일기를 찾아보니 15코루나를 주고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는 메모가 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한국 돈으로 800원 정도인 것 같다. 그 돈도 가난한 학생 배낭여행자에게는 큰 액수였다. 첫 여행지가 카이로였는데, 그때 카이로는 물가가 정말 쌌다. 이집트 로컬 식당에서 코사리 한 그릇을 배부르게 먹는데, 200~300원 정도였다. 도미토리 하루 숙박이 3,000원 전후였던 것 같다. 만약 프랑스 같은 서유럽을 여행하다 프라하에 갔다면 물가가 너무 싸서 모든 것이 공짜라 생각했을 수 있지만, 이집트에서부터 프라하에 갔기 때문에 지갑을 꺼내기가 조심스러웠다. 그래도 프라하 맥주가 워낙 유명하고 맛있다고 해서 슈퍼마켓에서 가끔 사 먹었다. 큰 병맥주(500ml) 가격이 16코루나로 메모가 되어 있다. 한국 돈으로 천 원 정도였지 싶다. 그때는 1달러를 쓰려면 망설이고 망설이다 큰마음을 먹어야 할 때였다.


카이로에서 시작한 나의 첫 배낭여행은 이집트에서 한 달을 머물고, 이스라엘, 그리스, 불가리아, 루마니아, 헝가리를 거쳐 프라하로 갔다. 최종 목표는 런던이었다. 그때까지 한국 사람을 놀랄 정도로 가장 많이 만난 곳은 예루살렘이었다. 예루살렘에 머무는 3주를 통틀어 20~30명 정도의 한국 사람을 만난 것 같다. 이스라엘 하이파 항구에서 배를 타고 로도스, 산토리니를 거쳐 아테네에 머무는 2주 동안 단 한 명의 한국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부다페스트 광장에서 한국 여행자 3명을 한꺼번에 만나 무척 반가워하며 나눈 이야기가 20년이 훨씬 지나도 어제 일처럼 선명할 정도다. 어쩌다 일본 사람을 만나면 사막의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 금방 친구가 되던 시절이었다. 같은 동양인이라는 사실이 어찌나 친근하던지. 막연하게 일본을 싫어하던 나는 배낭 여행을 통해 국적이나 인종, 성별 같은 조건이나 상태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걸 자연스레 배웠다.


예루살렘 정도는 아니지만, 프라하에는 한국 사람들이 좀 있었다. 어쩌다 보니 카를교 근처에서 한국 사람 8명(나 포함 모두 학생)이 한꺼번에 만나 길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마침 지나가던 한 한국 중년 남자가 우리를 보더니 무척 반가워했다. 그 사람은 학생들이 돈도 없을 텐데, 먼 곳까지 와서 여행하느라 고생이 많다며, 맛있는 것을 사줄 테니 먹고 싶은 걸 얘기해보라고 했다. 우리는 환한 얼굴로 KFC를 선택했다. 그 당시 맥도날드, 버거킹, KFC 같은 곳은 돈을 아껴야 하는 학생 배낭여행자들이 어쩌다 큰마음 먹고 몸보신하는 곳이었다. 그 날 KFC에서 우리 9명은 치킨 뼈를 산더미처럼 쌓으며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4개월의 첫 배낭여행 기간을 통틀어 가장 맛있게, 가장 배부르게 가장 고맙게 음식을 먹었던 장면이다.


세월이 흐르고 나도 직장인이 되었고, 퇴직 후 여행을 다녔다. 2003년 석 달 동안 북미 여행을 할 때다. 자신이 인디언이라고 믿는 한 70대 백인 히피 할머니와 사우스 다코다 운디드니 근처의 조그만 마을에 갔다. 그곳 마을에서 원주민들을 위해 사회활동을 하는 수녀를 만나 3명이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리가 파할 무렵 수녀는 나를 위해 값을 치르고 숙소를 예약했다고 말했다. 난 예상치 못한 호의에 고마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했더니, 그녀는 웃으며 딱 한 마디로 잘라 대답했다. "Spread Peace!!"


그녀의 강렬한 한마디 때문이었는지, 프라하의 고마운 기억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뒤로 여행을 떠날 때 100~200불 정도는 여행하며 만날 누군가를 위한 돈으로 정했다. 옛날 프라하에서 마주친 그 사람처럼 힘들어하는 학생 배낭여행자를 만나면 밥을 사주기도 하고, 가난한 네팔 청년에게 공부를 더 하라며 100불을 주기도 했다. 인도처럼 구걸하는 사람이 많은 곳에 머물 때는 주머니 속 잔돈은 항상 그들을 위한 돈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여행이 거듭될수록 나는 조금씩 변했다. 어릴 때 활발히 잘 웃던 아이가 자라며 점점 과묵해지는 것처럼, 나는 다양한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는 여행자에서 조용히 혼자서 관찰하는 여행자가 되어갔다. 한국인들이 너무 많아져 여행지에서 한국 사람들을 되도록 피해 다녔다. 식당 바로 옆자리에 한국 사람이 앉아도, 한국 사람 아닌 척했다. 그런 변화는 오로지 나의 의지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스마트폰 때문에 여행 문화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200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여행지에서 길을 묻는 것은 흔한 풍경이었지만 지금은 모두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을 들여다보면 다 해결된다. 연인, 가족이 함께 여행을 떠나와 카페, 식당에서 각자의 스마트폰만 바라보고 있는 장면은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당연한 풍경이 되었다. 여행지에서 어디에 가고, 무엇을 먹고, 어떤 경험을 할지도 앞선 누군가의 후기를 보고 정한다. 여행 정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경험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오늘날의 여행이다. 잘 재현하면 좋은 여행, 그렇지 않으면 엉망인 여행이다. 재현의 다른 이름은 계획이다.


내가 생각하는 여행의 의미는 <예상치 않은 우연과의 만남>이다. 여행지에서의 경험이 모두 계획된 것이라면 재미도 없고 답답할 것 같다. 일도 계획된 대로만 착착 진행된다면 굳이 그런 일을 사람이 할 필요가 있나 싶다. 삶도 원하는 대로만 살아가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면 철저히 계획대로만 움직이는 여행과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다. 여행지에서 우연히 낯선 사람과 만나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고 배운 것이 많다. 배우기 위해서는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거는 습관을 길러야 할 텐데, 점점 더 내성적으로 변해가니 큰일이다. 여행, 삶, 일은 닮은 것 같다. 우연과 필연, 계획과 실행, 예상과 결과 사이에서 희노애락을 느끼는 과정이다. 여행다운 여행, 삶다운 삶, 일다운 일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를 도우려는 마음이라 생각한다.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고 기억나는 것은 근사한 레스트랑에서 말 못 하고 죽어간 짐승의 몸뚱아리를 입에 넣었을 때의 오묘한 식감이 아니라, 난관에 빠졌을 때 서로 도움을 주고받은 기억들이다. 수십 년이 흘렀어도 닭튀김, 프라하, KFC, 사우스 다코다, 모텔, 수녀, 인디언, 진로 이런 단어를 마주칠 때마다 도움 받았던 고마운 기억이 떠오른다.삶도 일도 마찬가지라 믿는다. 그런 기억으로 살고 그런 일을 하기 위해 사는 거라 본다. 어쩌면 삶은 목적도 의미도 없는 건지도 모른다. 이 순간 누군가를 돕는 행위 그것 말고는 텅 빈 우주처럼 아무것도 없는 것이 삶일지도 모른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고산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