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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리플래닛

by 피라


첫 여행을 떠났던 1998년에는 종이 지도가 필수품이었다. 현지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여행 인포메이션 센터를 들러 지도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물론 배낭 속 가이드북도 있었다. 나는 론릿플래닛 한 권을 손에 쥐고, 나침반 목에 걸거나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현지에서 구한 지도와 론리플래닛 지도로도 헷갈려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물어 보았다. 하루에도 셀 수 없이 길을 물어봤다. 헤매다 헤매다 물어보기도 하고, 지도가 담긴 책을 꺼내보기가 귀찮아서 물어보기도 했다. 길을 묻는 건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런 여행자의 기본 행동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때 한국 여행자는 론릿플래닛파와 세계를 간다파로 양분되었다. 그때 <론릿플래닛> 시리즈는 대부분 영문판만 있었고, <세계를 간다> 시리즈는 한글판이었다. 세계를 간다 시리즈는 일본책인데, 한글로 번역 출판된 책이었다. 그런데 세계를 간다는 업데이트가 늦고, 지도도 현지 상황과 잘 맞지 않아 자주 헤매곤 했다. 그래서 배낭 여행자들 사이에서는 세계를 간다가 '세계를 헤맨다'로 통했다.


나는 론리플래닛파였는데, 론리플래닛을 장점은 세 가지였다. 1. '지도의 정확성', 2. '문화, 역사, 철학을 아우르는 깊이 있지만 간결한 정보', 3. '교환 가능성' 이었다. 그 당시 게스트하우스 등에 만나는 여행자들은 유럽, 아메리카, 호주 출신이었고, 그들은 대부분은 론리플래닛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론리플래닛이 내가 가려는 나라(혹은 도시 및 지역)고, 내가 가지고 있는 론리플래닛이 그들이 가려는 나라인 경우(서로 마주치는 동선), 우리는 서로 책을 맞교환했다. 두께 등으로 책 가격 차이가 나면 즉석에서 그 만큼의 돈을 주고받으며 책을 교환했다. 그런 식으로 나는 4개월 배낭 여행을 위해 가지고 간 책은 이스라엘편 하나였는데 계속 교환을 하며 여행했다. 떠날 때 가져간 간 론리플래닛 이스라엘편은 교환과 교환을 거듭해 돌아올 때는 런던편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여행자들이 많이 머무는 곳에 여행자들을 위한 중고 책 서점은 가이드북 교환 문화가 발전한 형태 아닌가 싶기도 하다.


거리에서 길을 묻고, 가이드북 제목만으로 긴 이야기를 나누고, 때가 묻는 가이드북을 서로 교환하던 시절이 그립다. 처음 마주친 이들과 순식간에 친구가 되어 이야기를 나누곤 하던 옛날의 여행이 그립다. 낯선 이들과 낯선 이야기를 하며 나는 어디서 왔고, 여기는 어디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아가곤 했다. 그 맛에 여행을 했다. 사회가 팍팍하고 삶이 답답하다면 나와 다른 사람들과 오래 동안 이야기를 나누지 않은 탓인지 모르겠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면 너무 오래 동안 길을 물어보지 않은 탓은 아닐까? 옛날 손 때 묻은 론리플래닛이 그립다. 세월이 흐른 뒤 생각해 보니, 목적지는 그저 길을 묻고 길을 생각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 같다. 길 위에서 낯선 것과 만나던 그 사소한 순간들이 여행의 정점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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