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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

by 피라


학생 때 첫 배낭 여행을 다녀온 뒤 40살 전까지 50개국 여행을 하겠다는 막연한 목표가 생겼다. 틈틈이 여행을 다녔다. 대략 30개국에 20개월 정도 여행한 듯 하다. 여행이 거듭되니 어디를 갔고, 얼마나 머물고는 의미 없어졌다. 그리 많이 다닌 것은 아니지만 나름 좀 다녔으니 여행에 대해 할 말이 조금 있을 뿐이다.


지난 여행 중에 딱 하나만 말해 보라 하면 망설이지 않고 그 하나를 말할 수 있다. 다만 아직 정리되지 않아 표현하기기 힘들 뿐이다.


발리 우붓에 처음 갔을 때다. 관광지는 가보지 않고, 하루 두 번 동네 산책하고, 수영하러 다니고, 글을 쓰고, 잠시 머물던 호텔에 들러 친하게 된 발리 친구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지내는 것이 나의 일상이었다. 하루는 까덱이라는 친구가 나보고 폭포에 가보라고 했다. 근처에 볼만한 폭포가 있다며 가는 길을 알려 주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그날은 그 폭포를 보러 갔다. 오토바이를 몰고 찾아가다 길을 잃었다. 숲 속에 길만 하나 있는 인적 없는 곳에서 방향을 완전히 잃은 나는 길을 물어볼 누군가를 찾아 오토바이를 이리저리 몰았다.


길 끝에 사람이 보였다. 근처에 집을 짓는 공사를 하는 듯 했고, 저 멀리 한 사람이 공사 자재 근처에 서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오토바이를 재빨리 몰아 그쪽으로 달려갔다. 공사용 석재가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고, 그 사람은 석재를 머리에 가득 이고 막 일어서고 있었다. 40대쯤 보이는 여자였다. 온 몸에 회색 돌가루를 뒤집어 쓴 여자의 얼굴은 땀과 돌가루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고, 헐렁한 옷도 땀으로 젖어 부분 부분 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예전 이집트 룩소르를 여행할 때 섭씨 40도가 넘는 살인적인 더위의 공사장에서 곡갱이로 땅을 파고 있던 노동자를 보며 숙연해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생존을 위해 너무나 힘겨운 노동을 죽을듯 살듯 하고 있다는 걸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영어를 전혀 못하는 현지인에게 길을 물어볼 상황을 대비해 폭포를 발리어로 뭐라고 하는지 메모해 두지 않은 것 후회할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렇게 필사적인 노동을 하며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 길을 물어보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용무가 있어서 달려온 내가 아무 말 없이 사라지면 더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았다. 지탱하기 힘든 무거운 돌들을 머리에 이고 줄줄 흐르는 땀에 눈도 제대로 뜰 수 없는 회반죽같은 돌가루를 뒤집어 쓴 몰골의 여자는 한 발자국이라도 빨리 석재를 놔 둘 곳으로 가야 할 상황에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말했다.


"Could you tell me the way to the waterfall?


석재를 잔뜩 머리에 이고, 두 손으로 떠받친 체 찡그리고 힘들다 못해 망연한 표정이었던 여자는 나의 말을 듣더니 잠시 1초 정도 생각하고는 나를 향해 활짝 웃었다. 그건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종류의 미소였다. 저런 힘든 상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이 세상의 미소가 아니었다. 나는 여자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오토바이를 다시 몰았다. 그게 끝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나의 여행 중 가장 감동적인 경험이다. 그 여자의 얼굴을 본 시간은 도합 3초나 되었을지 모르겠다. 그 짧은 찰나가 내 여행 인생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다.


오토바이를 몰아 폭포를 찾으러 가는 길은 그 여자 때문에 받은 충격으로 정신이 멍했다.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고, 조금씩 알 것 같았다. 지금도 알아 나가는 중이다. 그 여자는 내 평생 만났던 모든 인간 중에 가장 고귀한 사람이었다. 가장 힘든 순간에 처음 보는 타인을 위해 자신의 삶을 담아 최선을 다해 웃어주는 사람. 그 웃음 속에는 나는 너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내가 널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라는 마음과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방식, 인간이 다른 존재를 대하는 본질이 담겨 있는 듯 했다.


그 느낌을 잊지 않기 위해 그날 그 여자의 모습을 크로키로 그렸다. 타블렛에 그렸는지, 종이에 그렸는지 기억나지는 않았다. 그림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의 느낌은 뚜렷하다. 그건 고상하고 품위 있는 인간의 존엄한 모습이었다. 인간은 어떠해야 하는지 외치며 사소한 생각과 감정에 휘둘리며 사는 나를 향해 휘두르는 망치 같은 미소였다. 내가 우붓에 빠진 이유다.


술을 한 잔 하고 글을 쓰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술 때문이 아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풀어낸 탓이다. 어쩌면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살고 싶은 삶도 그런지 모른다. 좀 어렵게 살아야 재미있을 것 같다. 쉬운 것만 하면 시시하니까. 계속 연습하다 보면 생각이 간명해져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런 날이 올 수 있다면, 그때까지 살아 있으면 좋겠다.


그 폭포의 이름은 뜨그눙안폭포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발리에서 유명한 폭포였다. 그때는 입장료도 받지 않았었다. 발리 친구가 폭포의 물 색깔에 대해 말해 주었다. 이 폭포의 색깔은 처음에는 초록이었단다. 사람들이 조금씩 찾게 되자 파란색으로 변했단다. 더 유명해지자 회색으로 바뀌었단다. 사람이나 폭포나 알려지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닌 듯 하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면 폭포도 사람도 색깔이 변하나 보다.


생각해 보니 하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아무리 힘들어도 우붓에서 만난 그녀처럼 세상을 향해 웃을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것이 낯선 것이든 익숙한 것이든 좋아하는 것이든 싫어하는 것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러다 보면 알게 될 것 같다. 삶이란 힘든 것도 없고 편한 것도 없고 그냥 살아있는 상태일 뿐이라는 걸. 그 상태는 가엽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다는 걸. 그러니 나를 포함한 살아있는 모든 존재를 향해 미소 짓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걸. 그걸 알아가는 것이 삶의 이유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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