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고 불편한 기억이 있다. 캄보디아 뽀이뺏이란 곳에 간 적이 있다. 태국과 접한 국경 마을인데 태국 사람들이 카지노를 하러 오는 곳이라 들었다. 다른 캄보디아의 마을처럼 뽀이뺏에도 너무 가난해서 학교에 갈 수 없는 아이들이 많다 들었다. 지인의 단체에서 캄보디아 아이들을 돕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해서 나도 후원했다. 한 달에 1만원만 후원해도 아이들이 학교에 가서 공부할 수 있다고 했다. 얼마 뒤 아이들의 가정도 방문하고 관광도 하는 프로그램에 자비로 참여하게 되었다. 나 같은 후원자들 10여명과 함께 캄보디아행 비행기를 탔다.
앙코르와트에서 1박을 하고, 뽀이뺏으로 이동해서 후원 가정을 방문하고 다시 앙코르와트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특별한 의미를 느껴서 후원을 한 것도 아니었고,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방문 프로그램에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 존경하는 분이 그 단체에 관여하고 있어서 후원을 하라고 해서 후원했고, 캄보디아 방문을 하면 좋겠다고 해서 흔쾌히 알았다고 했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친한 친구 가족과 함께 갔기 때문에 재미와 의미도 있었다. 다 좋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불편해지는 두 장면이 있다.
첫 번째는 후원하는 아이들의 가정을 방문한 일이다. 프로그램의 목적이 후원 가정 방문이었으니 3일 일정의 하일라이트다. 방문한 가정들은 네팔, 라오스, 인도, 태국, 여행하면서 숱하게 보았던 평범한 시골집이었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 나무로 이층의 구조를 만들고, 짚류와 나뭇잎, 버린 판자 등으로 벽체와 지붕을 만든 동남아시아의 전통 가옥이었다. 개, 닭 등의 가축은 벽면이 없는 아래층 그늘에서 지내고, 사람은 이층에서 지내는 구조. 혹은 그런 구조가 변형된(때로는 단층) 집들이었다. 하나 공통된 것은 한 켠의 부엌 공간이 있고, 모든 식구가 한 공간에서 생활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같은 방문자의 눈에 그들은 가난했다. 그날의 만남으로 인해 우리는 그들 삶에 영향을 미칠 만큼 여유 있는 사람들이고, 그들은 우리의 도움을 받아야 할만큼 가난하고 불쌍한 삶이라는 다시 한 번 증명되었다. 바로 그 사실이 불편했다. 내가 그곳에 왜 갔는지 의문이 생겼고, 그 의문은 불편함으로 이어졌다. 불편함의 정체는 도움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도움을 주는 사람의 관점 때문이었다. 한 달에 1만원~3만원을 후원한다는 이유로 일면식도 없는 부자 나라 사람들이 자신과 자신의 일상이 이루어지는 사적 공간을 둘러보는 걸 지켜보는 경험. 그런 경험이 그곳 아이들과 아이들의 부모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두 번째는 후원 가정과 그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우리들(후원자)을 위해 환영 행사를 마련했는데, 노래와 춤으로 아이들이 공연을 했다. 짧은 공연이었겠지만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을까? 공연 준비를 하며 아이들의 마음에 어떤 생각들이 오고 갔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했다. 집을 팔아서 그들을 도운 것도 아니고(팔 집도 없지만), 잃어버려도 상관없는 단돈 만원 때문에 그런 대접을 받는다 생각하니 너무나 부끄럽고 불편했다. 불편함의 절정은 그 불편한 환영 행사에서 내가 후원자 대표가 되어 소감을 말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정리되지 않는 복잡한 생각으로 우리는 똑같다, 수평적 관계다, 우리가 당신들 삶을 돕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이 우리 삶을 돕는 것이다 등의 말을 횡설수설한 것 같다.
다른 존재를 도와주는 건 휴머니즘(인간다움)의 뿌리라고 생각한다. 이타성은 세상을 이루는 기초다. 이타성은 3가지 종류가 있는 것 같다.
1. 누군가를 돕는 행위가 자신에게 도움되는 것
2. 누군가를 돕는 행위가 자신에게 도움도 손해도 되지 않는 것
3. 누군가를 돕는 행위가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것
3의 대표적 사례로 일본 유학 시절 모르는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이수현군 이야기가 있다. 인간의 이야기든 동물의 이야기든 이타성이 클수록 가슴 아프고 감동적이다. 선물을 해도 내게 소중한 것, 내게 가치가 있는 것을 기꺼이 줄 수 있어야 서로에게 의미 있다. 어차피 버릴 걸 나눔하는 행위에 담겨 있을 이타성은 미미하다.
자기 브랜딩이 넘쳐나는 시대라, 개개인이 기업의 홍보실이 된 것 같다는 걸 종종 느낀다. 이타성이 도구화되는 현상이 불편하다.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도움 받는 사람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 받는 사람 입장에서 도움이란 수치, 부담, 고마움, 모멸감, 자괴감, 뻔뻔함, 빚, 포기, 책임감 등의 다양한 정서가 흐를 것이다. 상대의 입장을 깊이 헤아리지 않는 도움은 점심 밥값을 계산하는 것이든, 수백 억 돈을 쾌척하는 것이든 문제가 될 수 있다. 남을 돕는다는 것은 돈이나 행위만큼이나 거기에 담긴 진실한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알리지 않고 조용히 이타적 행위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도움을 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기 때문인 것 같다.
자기 브랜딩을 위해 계산적 이타적 행위를 하는 사람, 그런 행위를 노골적으로 알리는 사람들을 비난할 자격이 내게는 없다. 자신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점에서 나도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니까. 난 평생을 나만을 위해 살아온 이기적인 사람이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다. 누군가를 돕는 일은 나를 돕는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나는 3번처럼 이타적인 사람이 될 수 없다. 나는 퇴근 길에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발견하고, 그를 구하기 위해 내 삶을 버리고 선로 아래로 점프하는 사람이 될 수 없다. 생면부지의 타인을 구하려다 26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자식을 향한 부모의 복잡한 심경을 이해할 수 없다면 남을 돕고 있다는 생각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자의식 과잉은 이타적 태도에도 이기적 태도에도 똑같이 나타난다. 이기성과 이타성을 구분 짓지 않았으면 좋겠다. 들숨과 날숨의 호흡처럼 이타심과 이기심을 자연스런 인간의 행위로 여겼으면 좋겠다. 그러면 좀 이타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기적인 내 모습에 괴로워할 일도, 이타적인 모습을 과시할 일도 줄어들 것 같다. 그러면 삶이 좀 더 나아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