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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by 피라


노트북을 처음 산 건 2002년 2월이다. 그 당시 세상에서 가장 얇고 가볍다는 도시바의 제품을 샀다. 오로지 글쓰기 하나에만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노트북으로 1년 안에 책을 하나 내고 퇴직하는 것이 목표였다. 노트북에 대해 좀 안다는 회사 동료에게 노트북을 보여주니 180만원 짜리 타자기를 산 것이라며 여러 기능들이 있는 올인원을 사야 한다고 했다. 나는 팔랑귀인가보다. 그 말에 넘어가 다시 올인원으로 바꿨다. 노트북의 여러 기능(예컨데 CD를 넣어서 영화를 보는) 때문인지 글을 완성하지 못했고, 이듬해 봄에 노트북을 가지고 미국으로 긴 여행을 떠났다.


그 동안 도시바올인원, HP타블렛, 소니바이오, 맥북에어, 넷북, 도시바, 삼성타블렛북, 엘지그램, HP타블렛 등을 사용했다. 이 중 3개는 한 달 정도 잠시 사용하다 바꿨다. 아이패드도 세대 별로 4개를 써봤다. 핸드폰, 스마트폰은 8개 째 사용중인 것 같다. 모두 주 용도는 글쓰기 혹은 메모였다. 노트북은 글쓰기와 메모, 스마트폰으로는 메모를 했다. 학창시절 교과서에 메모광이라는 수필에 '뇌수의 분실'이라는 표현이 있었다. 저장 공간을 따로 마련한다는 뜻이다. 어쩌다 보니 지난 삶은 외부 저장장치에 메모를 해 온 삶 같다. 매일매일 뭔가 떠오르면 스마트폰 등에 메모를 한 지 오래되었다. 오랜 세월 여기저기에 메모가 쌓이니 메모보다 중요한 것은 메모를 관리하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모르고, 메모를 한 사실조차도 잊어버린다. 어지러운 상태에서 새로운 메모만 한다. 지난 메모를 모르기 때문에 이 메모가 새로운 것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메모의 활용은 없고 메모를 하는 행위만 지속하며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에 머무는 상태다.


몇 개의 핸드폰, 스마트폰은 메모와 함께 사라졌다. 노트북의 글과 메모도 많이 사라졌다. 외장하드에 백업을 한다고 했지만, 세월이 흐르다 보니 외장하드가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상태다. 뭔가를 찾으려면 쓰레기 매립장을 헤매며 반지를 찾는 느낌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어떤 메모와 글을 썼는지를 잊어버린 상태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는 것이다. 기억하고 싶은 생각과 아이디어가 언제 어디서 사라질 지 모르는 0과 1의 디지털 신호로 저장하는 일이 찝찝해 한 동안 노트에 펜으로 쓰기도 했다. 클라우드가 대안이란 생각도 들었다. 가끔 클라우드나 저장 장치에서 까맣게 잊고 있던 파일을 발견해 남이 쓴 것 같은 글을 읽는 발견도 있다.


정리하기 위해 메모를 하지만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는 상태에 오래 머물다가 작년부터 에버노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메모와 검색이라는 두 가지 기본 기능만 사용하지만 나 같은 사람에게 유용하다. 특히 사진을 찍은 문서에 담긴 단어까지 검색해 주는 기능에 훅 갔다. 처음 그 기능을 알고는 아찔할 정도로 감동 받았다. 이제 조금 체계가 잡혀 가는 듯 하다. 쓰고 보니 에버노트 홍보글 같다. 돈 받지 않았다. 데이터나 툴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다.


쓴다는 것은 단순한 행위다. 잘 쓰기 위한 온갖 준비와 조건들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쓴다는 행위를 방해할 때가 많다. 삶도 비슷한 것 같다. 아무 생각 없이 감각만 쫓으며 사는 것도 문제지만,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을 너무 하는 것도 삶에 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다. 고민 많이 했다는 사실만 남기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 지 싶다. 내 지난 삶이 그랬다. 그 시간에 남을 돕고, 마음이 가는 뭔가를 향해 망설임 없이 한 발 한 발 걷는 일이 훨씬 좋을 것 같다. 자신이 어느 지점에 있는지 알아야지 생각을 늘릴 것인지, 줄일 것인지 판단할 수 있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의미 없는 삶을 사는 모순에서 벗어나야 한다.


월리엄 진서가 존경하는 E.B.화이트가 글쓰는 모습을 담은 사진은 그런 본질적 메시지를 보여준다. 오래된 타자기 하나, 쓰레기통 하나, 책상, 의자, 그리고 글쓰는 사람. 이것이면 충분하다. 그 외의 것들은 군더더기다. 인생도 그렇다. 살아있고, 생각을 할 수 있다면 충분히 갖춘 것이다. 나머지는 옵션이다. 쓰다와 산다는 비슷한 것 같다. 삶이 쓰다고 느낄 때 우린 뭔가 쓸 수 있다. 쓰다 보면 삶이 달게 여겨질 거라 믿는다. 쓰이지 않는 메모처럼 너무 많은 것들이 쌓이기만 하면 쓴 맛이 강해지는 것 아닐까? 생각을 하고, 글을 쓰고, 행동을 하는 건 쌓인 메모를 정리하는 일 같다. 살아있는 시간이 메모 내용이고, 삶은 메모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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