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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by 피라


그림을 그려보았다. 4년만인 것 같다. 오랜만이라 여러모로 서툴다. 특히 처음에는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대충 완성은 했다. 그림도 글도 일도 일단 어떻게라도 완결시켜야 한다. 그래야 수정할 것들이 보이고 다음에 어떻게 해야 더 잘할 수 있는지 보인다. 나이들수록 삶도 그런 것 같다.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일단 완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30대에 인생을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기로 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잘 할 수 있는지, 무엇이 재미있는지 생각해보았다. 두 가지가 있었다. 야구과 그림이었다. 야구는 이미 늦었으니 사회인 야구로 만족해야 했다. 그림을 해야겠다 결심했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잘 그린다 소리를 들었다. 무엇보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평소 맛볼 수 없는 몰입감이 느껴져 행복했다. 미대에 가려고 고민하고 준비했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포기했다. 그림 대신 선택한 것이 글쓰기였다. 미술은 돈이 많이 들지만 글쓰기는 노트북 한 대만 있으면 되니 만만하게 보였다. 그때의 결정을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취미도 아니고 직업도 아닌 애매한 상태에서 혼자서 틈틈히 그림을 그렸다. 잡지 떼기도 한동안 했었고, 이런 저런 책을 보았다. 테크닉보다는 그림을 그리는 자세와 태도에 더 마음이 갔다. 결국 철학이었다.


내게 그림은 재미와 의미, 두 가지로 다가온다. 뭔가를 보고 비슷하게 그리는 것은 재미는 있지만 의미가 없었다. 보지 않아도 상상하는 것을 그려내고, 보이지 않는 것, 세상에 없는 것을 그리고 싶었다. 그런 것들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림과 점점 멀어진 이유는 의미를 찾다가 재미를 밀어낸 결과 아닌가 싶다. 의미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야겠다. 재미가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퇴직 시점에 인디언(아메리카 원주민)에 빠졌었다 . 나바호, 수, 호피족의 나라에 가기도 했다. 앞으로는 그림의 나라로 떠나고 싶다. 한 달에 한 두 장이라도 그려야겠다. 건강에 도움이 될 것 같다.


2022년 6월 26일은 야구와 그림 관점에서 두 가지 의미가 있는 날이었다. 황금사자기 우승을 한 경남고 감독을 만나 여러 이야기를 깊이 나누었고, 그림을 완성했다. 전광열감독은 야구감독이라기 보다는 훌륭한 교육자였다. 학생들을 자식처럼 여기며 묵묵히 바라보는 감독, 우승보다 인성을 가르치는 야구감독, 프로야구에 진출하는 것 보다 세상을 살아가는 올바른 마음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감독이었다. 친구로 안 지는 오래되었지만, 그가 그렇게 훌륭한 철학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다. 관심을 가지고 물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오래 전에 살다 간 한 번도 본 적 없는 인디언 추장의 눈빛과 어제 만난 친구의 눈빛이 닮았다.


그림에게 삶을 물어보고 싶다. 혼자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것 같다. 설레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잘못 그린 부분이 많다. 문제와 허점이 많지만 일단 내 놓으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보인다. 그만큼 삶은 나아질 것 같다. 인터뷰처럼, 그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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