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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타인터뷰 Jul 01. 2022

연필


고등학교 미술 선생님의 별명은 황금 박쥐였다. 이마와 정수리에 탈모가 상당히 진행되고 옆 머리와 뒷머리만 숱이 있어서였는지, 트레이드 마크였던 버버리코트 깃을 세우고 걷는 모습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다들 황금 박쥐라고 불렀다. 


고등학교 1학년, 황금 박쥐와의 첫 수업은 아직도 생생하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 교실에 들어온 미술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연필 쥐는 법도 몰라. 내가 연필 쥐는 법을 가르쳐 주지."


상징적인 표현 혹은 그냥 하는 말인지 줄 알았다. 선생님은 진짜로 연필 쥐는 법부터 가르쳐주었다. 처음에는 선 긋는 걸 시켰다. 미술 시간 내내 연필을 쥐고 선을 긋는 일만 반복했다. 다음 시간에도 다음 시간에도 선만 그었다. 가로로 긋고, 세로로 긋고, 대각선으로 긋고, 곡선을 그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한 학기 내내 선만 그었던 것 같다. 어떤 아이들은 비웃으며 싸이코라 불렀다. 내가 생각해도 정상적인 선생님은 아니었다. 


그 다음에는 4B연필로 여러가지 진하기의 선을 긋는 연습을 시켰다. 선생님은 4B연필 한 자루로도 수십 가지 색깔을 낼 수 있다며 가장 연한 선부터 가장 진한 선까지 얼마나 다양한 진하기의 선을 그을 수 있는지 스스로 발견하라 했다. 다음 한 학기 정도는 다양한 진하기의 선을 긋는 연습을 했다. 싸이코라 부르는 아이들이 점점 많아졌다.


2학년이 되자, 4B연필로 면 그리는 연습을 시켰다. 일정한 진하기의 선을 일정한 면 안에 반복해서 그으면 면이 된다. 가장 연한 면부터 가장 진한 면까지 반복해서 연습시켰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연필로 선긋기만 했다. 마지막 과제는 스케치북에 지리산 천왕봉에 오르면 볼 수 있는 중첩된 산들을 선으로 그린 다음, 가장 가까운 산은 가장 진하게 시작해서 점점 연한 색깔로 산의 면을 채우는 나가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4B 연필 하나만 쥐고 선 긋는 연습만 한 것이었다. 


뒤에 알게 되었지만, 힘을 줘서도 안 되고, 힘을 빼서도 안 되고, 적당히 힘을 주고, 손목과 팔 손가락이 연필을 중심으로 힘을 골고루 받으면서 탄력적으로 스케치할 수 있는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 그런 기술을 터득하는 것이 선생님이 말씀하신 연필 쥐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연필을 쥐는 방법을 통해 다양한 진하기(다양한 느낌, 다양한 색깔)의 선과 면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능력을 터득하게 된 것이다. 아직까지도 괴짜 선생님이라 기억하는 학생들도 있겠지만, 고등학교 미술 선생님은 내게 너무나 고마운 선생님이다. 내게 미술을 가르쳐준 단 한 명의 선생님이셨기 때문이다. 그것도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연필 쥐는 법을 가르쳐주신 분이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잘 몰랐다. 그 당시에는 4B 연필과 친해진 것, 연필이 내 몸처럼 여겨진 것, 연필 하나로도 이렇게 다양한 색깔과 느낌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정도만 알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미술 선생님이 너무나 많은 것을 가르쳐주셨다는 걸 깨닫는다. 손에 쥔 것이 연필이든 붓이든 디지털 펜이든 어떻게 쥐고 어떻게 선을 그어야 하는지 안다. 3년 동안 선만 그었으니 당연하다. 익숙하지 않은 펜을 쥐고 익숙하지 않은 선과 면을 그려내어야 해도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펜을 잡아야 하는지 알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다. 한 해 한 해 나이 먹고 여러 경험의 레이어가 쌓일수록 고등학교 미술 시간 3년 동안 연필을 쥐고 선을 그은 일이 그림을 그리는 일 뿐만 아니라, 살아가는데도 큰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내게 연필 쥐는 법을 가르쳐주신 그 분은 미술 평론가 옥영식선생님이시다.  운 좋게 43살에 그 분을 졸업 후 처음으로 만날 수 있었다. 그때, 부끄럽지만 내가 그린 첫 그림책을 선생님께 드리며 연필 쥐는 법을 통해 내게 미술을 가르쳐 준 나의 유일한 선생님이셨다며 고마움의 마음을 전했다. 그 뒤로 한 동안 선생님을 만나 미술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앙리 루소, 카스파르 프리드리히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 주셨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미술을 가르쳐 주시고, 중년이 된 학생에게도 미술을 가르쳐주신 그 분은 나의 영원한 미술 선생님이시다. 모두가 입시만 중요하게 여기던 시절, 기본을 모른다며 연필 쥐는 법을 가르쳐준 선생님이 자랑스럽고 고맙다.


책을 한 권 생각하고 있다. 생각한 지는 꽤 오래 되었다. 10년은 혹은 그 이상 되었다. 연필 쥐는 법에 관한 책이다. 직업이라는 연필, 일이라는 연필을 어떻게 쥐어야 하는지에 관한 책이다. 테크닉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무궁무진하고 여전히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연필은 이런 것이고, 이렇게 쥐는 것이고, 이렇게 선과 면을 그으면 된다는 설명이 담긴 책이다. 책을 읽으면 나도 연필로 선 긋는 연습을 해 봐야지라는 마음이 생기도록 하는 것이 책의 목적이다. 한 사람의 진로란 각자의 연필을 쥐고 각자의 그림을 그리는 일이라 생각한다. 연필이 낯선 사람, 연필 쥐기를 싫어하는 사람, 연필을 자꾸 놓치는 사람, 연필을 쓰면서도 왜 연필을 사용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 무슨 연필을 살 지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내용이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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