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주의>라는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은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생각을 많이 한다. 완벽한 과정과 결과를 생각한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탁월한 과정과 결과, 의미 있는 과정과 결과를 중시한다. 이상적 가치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생각이 반영되지 않으면 김이 빠지기도 한다. 뭔가가 자신의 생각과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거나, 그럴 조짐이 보이면 그만 두거나 아예 아예 시작을 않는다. 상황과 정도의 차이지만 누구나 이런 성향이 있다. 인간은 스스로 <나>를 의식하기 때문이다. 완벽주의 혹은 그 언저리의 태도는 자아의 표현이다.
완벽 주의 반대편에 <일단 주의>가 있다. 무엇이든 일단 해보는 것이다. 결과와 과정, 의미와 목적 같은 건 생각하지 않고 무엇이든 일단 해보는 것이다. 삶에는 완벽 주의도 필요하고 일단 주의도 필요하다. 하지만 어느 한 쪽으로만 치우치면 문제가 생긴다. 운전을 배울 때 가속기만 밟는 법만 배워서도 안 되고, 브레이크 밟는 법만 배워서도 안 된다. 그림을 그릴 때도 마찬가지다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면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릴 수 없다. 연필로 선을 긋고, 붓질을 하고 난 뒤에는 멈춰야 한다. 멈추고 그림을 바라봐야 한다. 방금의 터치가 내가 생각하는 전체 그림을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었는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판단해야 한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세 가지 프로세스다. 터치, 관찰, 터치인데, 관찰이란 그리기를 잠시 멈추고 방금의 터치가 제대로 되었는지 관찰하며 판단하고 연결해서 어떤 터치를 할 것이지를 결정하는 과정이다. 엔진의 피스톤 행정 운동처럼 터치-멈춤-관찰-판단-터치의 과정이 무한 반복되는 것이 그리기의 과정이다. 찰나의 순간이든 그리기를 멈추고 커피 한 잔을 하며 미완성의 그림을 느긋하게 바라보든 마찬가지다. 멈추고 바라보는 과정 없이는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 속도의 차이일 뿐이다. 어떤 사람은 물레방아가 도는 속도로 그림을 그리고 어떤 사람은 나무 늘보의 속도로 그림을 그린다. 모든 그림은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인간의 삶도 그림과 같다. 일단주의는 멈춰 서서 일과 삶을 바라보지 않아서 문제고, 완벽주의는 멈춰 서서 바라보기만 해서 문제다. 자동차의 브레이크와 엔진처럼 일단 주의와 완벽 주의를 그때그때 적절히 섞어 일과 삶을 대해야 인생의 그림을 그려 나갈 수 있다.
아이는 말을 배우고 글을 읽자마자 학습이라는걸 한다. 학습의 목적지는 아이 삶의 궤적을 이루는 공부, 성적, 대학, 직업이다. 그중에 중심은 대학이다. 모두는 아니지만 대부분 그렇다. 아이의 미래는 장차 그가 진학할 대학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좋은 대학을 나와 힘든 삶, 엉터리 삶을 사는 경우도 있고,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행복한 삶,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경우가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의 관심은 성적과 대학으로 자꾸만 기운다.
삶과 미래는 불안하고 불확실한데, 공부를 잘한다는 상태와 좋은 대학이라는 조건은 확실성이라 쓰여진 티켓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단 성적에 집착한다. 아이들이 일단 공부를 잘 했으면 한다. 일단 좋은 대학을 가고, 일단 좋은 곳에 취업하길 바란다. . 좋은 곳에 취업에 좋은 삶을 살려면 일단 남들보다 빨리 달려가야 할 것 같다.
아이도 학부모도 멈춰 서서 그림을 바라볼 시간이 없다. 붓을 들고 미친 듯이 터치를 반복해야 한다 생각한다. 오로지 터치라는 행위를 통해서만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믿는다. 순간 순간, 언제 어떤 터치를 해야 하는지 20년치 계획이 촘촘히 나와 있다. 아이는 성인이 될 때까지 정해진 대로 기계적으로 터치만 하면 된다. 일단 멈춰 서서 자신이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 그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스스로 생각할 기회가 없다. 일단 무조건 멈추지 않고 그림을 그려야 한다. 무엇보다 멈추고 질문을 떠올릴 시간이 없다. 왜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 그림 그리는 행위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다.
자신이 그리는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든다면 멈춤과 바라봄의 시간이 부족한 탓일 수 있다. 혹은 멈추었을 때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통 모르는 탓일지도 모른다. 혹은 너무 오래 동안 멈춘 탓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익숙해진 탓일지도 모른다. 인생은 극단적이면 안 된다. 머리 속의 완벽주의가 자신의 정체성이라 착각해서도 안 되고, 일단 피스톤처럼 반복되는 숨 가쁜 하루하루가 삶의 실체라 여겨서도 안 된다. 통장 잔고만이 자신의 삶을 증명해 줄 유일한 신분증이라 생각해서도 안 되고, 주민등록증을 말소하고 지리산에서 움집을 짓고 고사리만 캐어 먹을 수도 없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멈춤과 행위, 가속기와 브레이크를 둘 다 잘 다룰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둘 다 충분히 잘 다룰 수 있는 사람인가? 생각해 볼 일이다. 상반된 두 가지를 자유자재로 다루려면 좋아하는 친구와도 놀 수 있고, 싫어하는 친구와도 놀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