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미

by 피라



나는 잘 모르겠다.




동물과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능력을 이용해 동물을 효율적으로 죽이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인간으로써 자랑할만한 일인지 잘 모르겠다.




심리학을 공부한 템플이라는 이름의 사람은 동물과 정서적으로 공감하는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동물들이 도살장으로 끌려갈 때 두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소의 몸을 압박하는 보정틀을 만들었고, 이 시설은 미국 가축 시설의 3분의 1에서 사용되고 있다 한다. 이런 업적으로 2010년 타임이 꼽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으로 선정되었다 한다.




나는 잘 모르겠다.




그게 동물과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능력을 가진 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는지, 최선이어야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동물은 언제까지나 인간에게 수단적 존재여야만 하는지, 동물과 인간은 어떤 관계로 공존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잘 모르겠다.




동물과 직접 대면하며 교감하는 인간은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꿈꾸어야 하는지, 동물과 대면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동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하나는 안다.


약자라는 이유로 고양이를 죽이고, 개를 학대하는 사람은 인간에게도 위협적이라는 것을.




어떤 동물은 가족보다 소중한 인간의 친구고, 어떤 동물은 지옥같은 철장에 갇혀 오직 인간의 고기가 되기 위해 슬픔과 고통의 숨을 쉬어야 하는지. 그런 상황에 무관심한 것이 고상한 인간의 길인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어렴풋이 하나는 알 것 같다.


나와 상관없는 약하고 낯선 존재의 생명을 함부로 여기지 않는 인간의 보드라운 마음이 인간의 문명을 여기까지 지탱하는 밑바닥 힘이었다는 걸.




만약 인간의 역사가 멈춘다면 그건 구분하고 차별하며 타자를 수단으로 여기는 태도가 들불처럼 퍼져 우리 자신을 공격한 탓일 거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 그 속에 피어나는 존재 그대로의 가치.


그것이 휴머니즘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이해로 일궈진 땅에서는 휴머니즘이 피어나지 않는다.


나와 멀리 있을수록, 나와 다를 수록, 나의 이해와 상관없을수록


세상을 살리는 휴머니즘이 더 피어난다.




저 멀리 어둠 속에 동물이라는 존재가 있다.


우리 곁에 음지에서 힘들게 사는 이들이 있다.


동물처럼 고통 받으며 슬픈 얼굴로 살아가는 인간들과 축사에 갇힌 동물들의 운명이 자꾸만 오버랩된다. 그리고 슬픈 얼굴로 등교하는 아이들.




정치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향해야 한다.


정치란 채식이냐 육식이냐를 가지고 지난한 논쟁을 하는 일이 아니라, 어떤 존재든 그들의 모습대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다른 존재를 이해하는 힘을 누군가의 이익을 늘리기 위해 사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고, 우리의 욕망을 줄여 타자의 슬픔을 줄이는 일이 인간의 기쁨이라는 걸 조금씩 알아가면 좋겠다.


그런 교육을 하고, 그런 정치를 하면 좋겠다.


고기를 덜 먹게 되고, 반찬이 줄어들고, 쇼핑을 덜 하게 되더라도 그 때문에 다른 누군가의 삶이 나아진다면 기꺼이 그런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타자를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 태도는 인간을 존엄하게 만드는 토양이다. 그런 휴머니스트들의 가치를 무겁게 받아들이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성장, 효율, 개발, 성공, 인정이라는 목적을 위해 우리 마음 속 한뼘 남짓 남은 자연마저 무언가의 도구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타자도 욕망의 도구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기적 욕망의 과정과 끝을 가르쳐 이타적 욕망의 가치를 깨닫는 교육, 그런 공부를 하면 좋겠다. 이기적 욕망의 끝은 자멸일 수 있고, 이타적 욕망의 끝은 공존과 번영일 수 있다는 걸 가르치면 좋겠다. 그런 가치라면 삶을 걸어볼 만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다. 우리의 학교, 우리의 직장, 우리의 사회가 그런 가치를 중히 여기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람은 그리 살아야 한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겠다.


한 때 그런 생각을 가진 이의 삶을 한심하다 여긴 적이 있었다.


좋은 대학을 가는 것 말고는 내 삶을 위한 선택을 생각할 수 없었던 시절에 나는 부모를 무시했다.


남을 생각하며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부모의 말을 나는 무시했다.


나도 부모처럼 생각했지만, 내가 속한 세상은 그런 물렁한 마음으로는 사람 노릇하며 살아갈 수 없는 곳이라 생각했다.


그때부터 이타성과 이기성 사이의 긴 방황이 시작되었다.




때로는 이기적으로, 때로는 이타적으로, 때로는 길을 잃고 방황했다.


긴 여행의 끝자락에서 결론을 얻었다.


자아를 버려야 자아를 찾을 수 있다는 마하리쉬의 말처럼,


인간은 이타성을 통해 진정으로 이기적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학교라고는 왜정 시절 소학교 5년 남짓 다닌 것이 다였던 늙은 어미의 말이 진정으로 옳았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다시는 세상의 파도에 흔들리며 긴가민가할 일 없다. 몇 몇 사람만 그렇게 믿는 것이 아니라 본다. 대부분의 사람은 언젠가는 같은 것을 알게 되는 것 같다. 빠르고 늦음의 차이일 뿐. 타인을 돕는 일은 나를 돕는 일이고, 나를 돕는 일은 타인을 돕는 일이라는 것. 세상은 도움을 주고받음으로 인해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삶의 의미는 도움을 주고받는 상호작용 그 자체에 있다는 것. 주고받음의 상호작용이 넓고 깊을 수록 삶은 의미 있고 행복해진다는 것. 삶이란 준 만큼 받지 못한 섭섭함과 받음만큼 주지 못함에 대한 미안함에 대한 문제 같다. 이 둘의 문제를 풀기 위해 깨치는 것이 배움이자 삶의 의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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