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
크고 아름다운 눈을 가졌다는 뜻의 에우로페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페니키아의 공주다. 에우로페에 반한 제우스는 멋진 소로 변신해 그녀에게 다가갔다. 에우로페 공주는 홀린 듯 소의 등에 올라탔고, 소는 곧장 바다로 뛰어들어 헤엄쳐 갔다. 공주를 태운 소는 한 섬에 도착했다. 그 섬에서 둘은 세 명의 아들을 낳았다. 세 아들 중 한 명의 이름은 미노스다. 유럽 문명의 시원인 미노아 문명은 미노스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유럽(Europe)이라는 말의 기원은 에우로페(europe) 공주의 이름이다. 제우스와 에우로페가 사랑을 나누고 미노아 문명을 꽃피운 그 섬의 이름은 크레타다. 크레타의 수도는 헤라클레스의 도시라는 뜻의 헤라클리온이다. 헤라클리온 외곽에는 미노아 문명의 크노소스 궁전 유적이 있다. 크노소스 궁전은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다는 미궁(labyrinth)으로 유명하다.
나는 1971년에 태어났다. 가장 격심한 경쟁의 세대였고, 가장 일자리를 구하기 힘든 세대였다.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아이가 태어난 해가 1971년이다. 102만명이 넘는 아이가 그 해에 태어났다. 초중고 내내 60~70명으로 구성된 학급에서 공부했다. 1990년 대입 시험에는 재수생 포함 86만명의 수험생이 응시했다. 어디를 가나 끝없는 줄을 섰다. 가나다순으로, 키순으로, 성적 순으로 줄을 섰다. 긴 줄에서 내가 선 자리가 미래를 규정하는 시대였다. 삶은 미궁 속 좁은 길 같았다. 길 잃은 사람들이 서 있는 줄을 삶의 길이라 여겼다. 일단 공부를 하고, 일단 대학을 가고, 일단 취업을 하면 삶의 미궁에서 벗어날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삶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내게 삶이란 1,000번 넘게 손잡이를 돌려 보아도 여전히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한 방들로 만들어진 3, 4층의 복잡한 크노소스 궁전 같았다. 그럴싸한 말로 포장된 관념적 삶의 이유가 아니라, 땀과 피의 언어로 말하는 삶의 이유를 찾고 싶었다. 이상적 삶에 기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현실 속 대답을 듣고 싶었다. 대학 졸업을 한 학기 앞둔 1997년 가을에 iMF가 터졌다. 한국 사회 전체는 헤어나올 수 없는 미궁에 빠졌다. 내 삶도 더 깊은 미궁 속으로 들어갔다.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자리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사회를 핑계로 졸업 후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삶의 이유도 모른 체 사회로 뛰어드는 건 알몸으로 칼 한 자루 없이 전쟁터에 투입되는 것보다 위험한 일 같았다. 이 전쟁을 왜 해야 하는지 영문도 모른체 죽어가는 군인들처럼 불행한 운명은 없다. 1997년 IMF와 취업 문제가 화두인 2022년은 닮았다. 경기 침체라는 사회적 상황은 미궁의 형식이고,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은 미궁의 내용이다. 삶은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하다. 삶의 물음에 주저없이 답할 수 있는 나만의 내용을 채우고 싶었다. 나만의 삶의 이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바로 그때 크레타에 가고 싶었다. 크레타에 가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이 멈출 것 같았다. 20대 내내 좋아했던 그리스 작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무덤이 있는 크레타에 가면 미궁에 빠진 삶의 길을 찾을 것만 같았다. 일단 휴학을 했다. 이듬해 6월까지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으며 크레타로 향한 긴 여행을 준비했다. 1998년에 유럽으로 가는 가장 싼 항공권은 65만원이었다. 6개월 오픈에 도착지와 출발지 변경이 안 되는 항공권이었다. 이집트 카이로로 들어가서 영국 런던으로 나오는 일정이었다. 지도를 펼쳐 놓고 카이로에서 런던까지 일직선으로 그어보니 선 위에 크레타가 있었다. '음.. 가는 길목에 크레타가 있군.... 이거야....'혼잣말로 만족해하며 항공권을 샀다. 첫 배낭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싱가포르를 경유해 1998년 6월 27일 밤 11시에 카이로에 도착했다. 35일 뒤인 8월 2일 해질녘에 나는 크레타 헤라클리온 방파제 위를 걷고 있었다.
1883년 크레타에서 태어난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남긴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라는 문장은 20대를 관통한 나의 좌우명이었다. 그 글귀가 적힌 그의 무덤과 박물관이 있는 크레타에서 드디어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았고, 돌아와서 의미있고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런 동화같은 이야기를 하진 못하더라도 크레타에 가면 최소한 삶의 힌트 정도는 얻을 거라 굳게 믿었다. 크레타에 가는 것만으로도 삶의 이유를 완성할 퍼즐 한 조각을 찾고, 내 정신은 단단해지고, 내 인생에 한 줄기 바람이 불어 불확실성의 안개가 조금이라도 걷힐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건 완전한 착각이었다. 크레타는 대학과 비슷했다. 일단 공부를 열심히 하면, 일단 대학에 가면, 일단 취업을 하면 삶의 문제가 해결될거라는 막연한 기대와 같았다. 그곳에 이르기만 하면 문제가 풀릴거라 믿고, 먼 길을 걸어 드디어 도착했지만, 그곳에서도 내가 기대하던 삶의 이유 같은 것을 찾지 못했다. 크레타에서 나는 완전한 절망감에 휩싸였다. 여행자의 가장 큰 절망은 더 이상 가고 싶은 곳도, 더 이상 머물고 싶은 곳도 없음이다. 크레타에서 나는 힘이 빠져 털썩 주저앉았다. 가장 닿고 싶었던 크레타에서 나는 가장 고독했고, 가장 외로웠고, 가장 지쳤다. 그런 상태에서 방파제 위를 걷다가, 어둠으로 물드는 오렌지 빛 노을을 바라보며 숙소로 발길을 돌렸다. 그때 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익히 봐왔던 닳고 닳은 아무것도 아닌 장면이었지만 그 순간 마음 속 스파크가 튀었다. 항구에 정박한 작은 배 위에 식탁과 의자 4개를 놓고 엄마, 아빠, 어린 아이 두 명이 노을 속에서 평화롭게 저녁 식사를 하는 장면이었다. 지치고 가난한 여행자의 외롭고 고립된 현실과 가장 멀리 있는 이상적 세상이었다. 나답게 살고 싶다는 강한 욕망의 불꽃은 현지인의 평범한 저녁 식사라는 당연한 일상 앞에서 검게 타버린 숯이 되었다. 바로 그때 '삶의 이유는 일의 이유'라는 짧은 문장이 떠올랐다.
진로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하나의 질문에 대한 여러 대답이다. 진로 문제가 어려운 이유는 질문은 하나지만 수만가지 대답이 있고, 한 대답을 선택하면 나머지 대답을 포기해야 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다. 채용 인터뷰에서 최악의 대답은 침묵이다. 침묵의 원인은 최고의 대답을 하려는 욕심 때문이다. 면접은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는 상호작용이 핵심이지 질문에 대한 정답을 말하는 과정이 아니다. 삶의 질문에 정답이 없듯 면접 질문의 정답도 없다. 그런 점에서 삶과 면접은 닯았다. 면접이란 자신의 삶과 앞으로의 삶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시간이다. 삶도 세상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과정이다.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주고받을 지 미리 생각하는 것이 진로 고민이다. 삶의 문제는 진로의 문제다. 진로를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초등학생부터 요양원 노인까지 진로를 고민한다. 진로 문제란 어떻게 살까라는 고민에 대한 대답이다. 모든 사람은 어떻게 살까를 고민하며 나름의 최선을 다하고 있다. 진로 문제를 푸는 방법은 선택과 행동이다. 진로 문제가 쉬이 풀리지 않는 이유는 마음을 열고 세상과 대화하기보다 최선의 선택을 먼저 하려는 욕심 때문이다. 그 욕심은 대체로 타인에 의해 주입된 욕심이다. 나의 욕망이 아닌데, 나의 욕망이라 착각하는 수많은 대답 속에서 길을 잃은 상황이 진로 문제의 본질이다. 진로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한 가지 물음에 대한 진실된 지속적 대답 과정이다. 자신만의 진로를 찾기 위해서는 지치지 않고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대답이 어렵고, 대답의 내용이 자꾸 바뀐다고 해서 질문을 멈추면 안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떤 일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구체화된다. 일이란 삶을 이루는 분자와 같다. "요즘 무슨 일 있니?"라는 질문에서 뜻하는 일이란 일상의 바탕 화면과 같은 삶 자체를 의미한다. "요즘 무슨 일하는데?"라는 질문에서 뜻하는 일은 직업을 말한다. 일이란 삶 자체이기도 하고 직업 행위이기도 하다. 일정한 돈을 버는 행위가 지속되면 직업이라 부른다. 직업은 일이라는 단위 행동들로 구성된다. 이미지 속에서만 존재하는 의사라는 직업의 상태가 아니라, 의사의 구체적인 일을 하며 그 속에 담긴 의미와 가치를 느껴야 직업을 유지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일이 삶을 무너뜨릴 수 있다. 삶을 무너뜨리는 것은 일의 없음이 아니라, 잘못된 일이다. 흙수저든 금수저든 인간은 일을 한다. 돈을 받는 일이든 돈을 받지 않는 일이든 인간은 뭔가를 해야만 하는 숙명을 타고났다. 일은 축복이기도 하고 저주이기도 하다. 어떤 이는 너무 많은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괴로워하고, 어떤 이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절망에 빠진다. 일을 가진 이는 일로부터 도망치려 하고, 일이 없는 이는 일을 가지려 삶을 바친다. 어떤 이는 일로 인생의 자부심을 느끼고, 어떤 이는 일로 인해 자괴감을 느낀다. 어떤 이에게 일은 살아가는 이유고, 어떤 이에게 일은 죽고 싶은 이유가 된다. 어떤 일을 하든 일 때문에 삶은 미궁에 빠진다. 삶은 온갖 일로 이루어진 끝을 가늠할 수 없는 미궁이다.
크레타 미노스 왕에게는 아리아드네라는 지혜로운 딸이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소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가진 괴물 미노타우루스를 죽이러 미궁으로 들어가는 테세우스에게 붉은 색 실타래를 주었다. 실을 풀면서 미궁으로 들어갔다가 나중에 그 실을 따라 나오라고 말했다. 실타래 덕분에 테세우스는 미궁에서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인생이라는 미로에서도 길을 잃지 않으려면 실타래가 필요하다. 삶을 이루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행위인 일을 따라가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다. 분명히 삶을 위한 일이었는데, 일이 삶을 공격하는 상황을 피하려면 <일의 이유>를 알아야 한다. 일의 이유를 알아야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일을 하지 말아야 할 지, 어떻게 일해야 할 지 알 수 있다. 일의 이유는 삶이 미궁에 빠졌을 때 길을 알려주는 표식이다. 여행이든 일상이든 직업이든 삶은 시작, 중간, 끝이 있다. 시작하지도 못하는 사람, 중간에서 헤매는 사람, 끝난 자리에서 멈춰버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시작과 끝을 이어주는 한 줄기 실이다. 그 실이 바로 일이다. 3개월 동안 카이로에서 크레타를 거쳐 런던으로 갔던 첫 배낭여행은 교훈은 삶은 언제나 떠났던 자리로 다시 돌아온다는 자명한 사실이었다. 매일 집을 떠나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다른 나를 꿈꾸며 분투하지만 변하지 않는 나로 다시 돌아오는 지겨움의 반복이 삶이다. 삶의 희망은 그 지겨운 반복 속에서 나무가 자라는 속도로 배우고 성장하는 일이다. 그 성장점이 바로 일의 이유와 일이 만나는 지점이다. 시작과 끝으로 이어진 길고 긴 실의 양쪽 끝 부분이 서로 만날 때 그토록 우리가 바라는 진짜 삶이 시작된다. 실의 양쪽 끝은 '삶의 이유'와 '일의 이유'다. 삶의 이유와 일의 이유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 서로를 배신하며 삶을 갈아먹기도 한다. 두 이유를 포개어 얼마나 중첩되는지가 한 사람의 직업 만족도와 삶의 만족도를 결정한다. 각자가 원하는 삶의 이유를 찾는 일은 어렵다. 행복, 의미, 가치 같은 개념들은 주관적이고, 다양하고,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의 이유는 찾는 법은 1+1=2의 간단한 계산처럼 쉽다. 일은 너무나 다양하지만 일의 본질은 똑같기 때문이다. 불특정 다수의 감정과 생각에 의해 내 삶이 좌지우지되는 불확실성의 시대일수록 저마다 삶의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 덜 흔들리고 덜 시행착오를 겪기 때문이다. 실패와 시행착오가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만,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이 없으면 시행착오만 남은 누더기 인생이 되기 십상이다. 삶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일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이듬해 첫 직장에서 기간의 정함이 없는 일을 시작했다. 일을 하고 싶어하는 청년들을 채용하는 일이었다. 퇴직 후 20년 동안 청년들이 자신의 일을 찾는 것을 도왔다. 자소서를 잘 쓰고, 면접을 잘 보기 위해 나만의 삶의 이유와 일의 이유를 연결지어야 한다고 강조해 왔지만 가장 중요한 퍼즐인 정작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나의 일이 관성이 되어 스스로 일이 무엇인지 깊고 넓게 묻지 않은 탓이다. 오래 전 크레타에서부터 일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지만, 가장 중요한 일의 본질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았고, 타인들에게 일의 껍데기만 말해 왔다. 누구보다 일에 대해 많이 안다고 생각했던 건 착각이었다. 이 책은 지난 20년간 일을 이야기해 온 내 삶의 반성문이다. 삶의 이유를 찾으려면 일의 이유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일에 대해 너무나 모른다. 공부를 그렇게 하면서도 공부가 무엇인지 모르듯, 삶을 그렇게 살아도 삶이 모르듯, 일도 마찬가지다. 부모를 잘 안다 생각하지만 부모의 삶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것과 같다. 부모가 돌아간 뒤 비로소 한 인간의 삶을 알게 되어 후회가 밀려 오듯, 삶의 시행착오는 일의 무지로부터 비롯된다. 그 무엇도 할 수 없을 때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너무 늦다. 삶의 문제는 일로 시작되고, 일에 의해 문제가 풀린다. 앎이란 해석의 문제다. 삶도 해석의 문제다. 자신의 해석만 옳다 여기면 삶은 자꾸만 미궁으로 빠진다. 다양한 사람의 다양한 해석을 깊이 이해해야 자신만의 해석을 해낼 수 있다. 다른 말로 가치관이다. 산다는 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가의 문제이며, 가치관은 삶의 이유라는 씨앗으로부터 뿌리 내린다. 직업이란 나의 가치와 일의 가치의 연결이다. 삶의 이유는 일의 가치에서 자라난 자란 열매와 같다. 지난 삶의 시행착오는 삶의 관점에서 일을 이해하려고 했던 것이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뀌듯 일의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면 많은 문제가 풀린다. 1999년 6월, 29살 신입 사원으로 첫 출근하던 내가 일에 대해 제대로 알았더라면 이후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지 궁금하다. 그때의 나처럼 일이 무엇인지 모른 체, 시키는 일, 해야 하는 일 속에서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이들이 일에 대해 당당한 목소리를 내기를 바란다. 일다운 일을 찾지 못한 이들은 자신만의 일을 찾아내고 스스로 일을 만들어내길 바란다. 일에 대한 나의 이야기가 더 이상 목적지가 없어 방파제 위를 비틀거리며 외롭게 일하는 여행자에게 내미는 의미 있는 말 한마디가 되면 좋겠다. 그래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함께 해지는 풍경을 바라보는 그림 같은 책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