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된 돌연변이, 중복, 분화를 거쳐 이번에는 수용기가 등장했다. 세포 밖에서 오는 신호를 변환하여 내부의 분자 활동에 전달하는 매개자 역할인 '수용' 분자들이다. 역시 진화 초기에 중복과 분화를 거쳐 다양한 종류의 수용기가 생겼났다. 가령 글루타민이나 GABA, 아세틸콜린, 세로토닌 등 특정 신호를 받아들이도록 전문화된 것이다.
수용기는 자신이 받아들이는 신호와 나란히 진화했다. 수용기가 전화하기 시작한 무렵, 자연은 신경전달물질이나 뉴로펩티드 같은 신호 분자도 발달시키기 시작했다. 하나의 신호에 들어맞는 수용기가 최소한 하나 이상 존재하고, 신호들은 서로 다른 일을 통제한다. 인슐린은 혈당치를 통제하는 신호이고, 아드레날린은 육체 행동을 준비시키는 신호이다. 사실 단어가 임의적인 만큼이나 이러한 신호들의 '의미'도 임의적이다. 우리는 아용야옹거리는 네발짐승을 '고양이'라고 부르지만, 스페인어를 쓰는 사람들은 '가토'라고 부른다. 인슐린의 구조에 타고난 무엇이 존재해서 아드레날린 대신 혈당치 조절 신호로 간택된 것이 아니다. 두 신호의 역할이 바뀐 외계 생명체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이 어쩌다 선택한 방식이 동물계 전체에 널리 퍼지고 만 것이다. - The Birth of the Mind
인생도 일도 여행과 같다. 여행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고 떠나는 여행과 아무런 계획없이 떠나는 여행이다.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더라도 100%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아무리 완벽한 사업 계획을 세워도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여행의 묘미, 삶의 묘미, 일의 묘미는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 생각하지 못한 영역에서 샘솟는다. 만약 코딩 프로그램처럼 입력된 대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결과가 나오는 게 인생이라면 기능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인간은 질식할지도 모른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정교한 코딩의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정교하고 완벽한 코딩도 다른 알고리즘과 만나 하나의 목표를 수행하려면 겹치는 부분, 겹치지 않는 부분, 새로운 부분을 생성, 통합, 수정해야 한다. 그래야 목표에 맞는 기능이 작동한다. 서로 다른 존재가 만나면 목표부터 확인하고 수정해야 한다. 우연, 불확실성, 변수가 생기는 이유다. 현실 세상의 중첩, 교차, 어긋남, 생성, 변화는 샘플링으로는 설명가능할 지 몰라도 전체를 명확히 설명할 수있는 수학 공식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걸 그냥 '삶', 혹은 '세상'이라 부른다.
돌고 돌아 전자책 발행을 해야겠다 생각했다. 전자책은 아주 오래전부터 못마땅했다. 눈에도 좋지 않고, 책이라는 입체적 물성도 없다. 무엇보다 내가 그 동안 전자책을 멀리했다. 올해 초 밀리의 서재에 가입해서 전자책을 읽기 시작했다. 종이책에 비해 몰입도는 높지 않았다. 단순히 정보의 습득 정보로는 괜찮아 보였다. 구글링하듯 책을 읽으니 짧은 시간에 많은 정보를 습득한다는 장점은 있었다. 음식으로 치면 전자책은 운전하면 허겁지겁 먹는 패스트푸드 같고, 종이책은 휴양지에서 천천히 먹는 만찬 같다. 만약 똑같은 책인데도 전자책으로 읽는 것이 종이책으로 읽는 것에 비해 몰입도도 낮고 배움도 적다면 그건 순전히 정보를 대하는 태도 차이 때문일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전자책 발행의 장점은 세 가지다. '혼자 다 할 수 있다.', '비용이 들지 않는다., '환경에 도움이 된다.'다. 또한 발행의 1차적 목적은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지럽게 쌓인 콘텐츠들을 일단 정리하는 것이니 여러모로 전자책이 답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상세한 제작 과정을 알아보다 문제를 만났다. 코딩이었다. 코딩을 하지 않고 전자책을 발행하는 여러 방법도 있지만, 결국 코딩의 문제와 만난다.
코딩은 모르고 전자책을 만들면 문제가 생겼을 때 대처할 수가 없다. 수정하기 위해서는 잘못된 코딩 부분을 찾아 고쳐야 하는데 그게 안된다. 코딩을 배울지 말지를 고민하다 나중을 생각하면 선택지가 없을 것 같아 전자책 코딩을 처음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코딩의 구조, 문법, 대부분의 언어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해되었다. 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첫직장 퇴직 직후였던 20년 전에 HTML을 공부했고, 1년 정도 프로그래밍했던 것이다. 그때 무슨 목적으로 코딩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단지 재미가 있어서 독학으로 코딩을 했던 것 같다. 덕분에 1주일 만에 전자책 제작에 필요한 코딩을 마스터했다. 전자책 발행에 필요한 코딩 언어는 간단하다. 이제 기본 형식의 전자책을 만들어낼 수 있다. 복잡한 것은 그때그때 응용해서 구현하면 된다.
참 편한 것은 인디자인이나 스크리버너에서 텍스트를 전자책 발행을 위한 코딩 문서로 변환해 준다는 것이다. 두 프로그램의 코딩을 비교해보니 소문대로 인디자인의 코딩 결과물은 체계도 없고 지저분하다. 스크리버너가 깔끔하다. 스크리버너를 쓴 지도 10년 넘었으니 오래된 신발처럼 익숙하다. 저작 프로그램인 스크리버너와 전자책 발행 프로그램인 시길이 만나니 날개를 단 듯 하다. 이 둘은 인체의 '수용 분자'와 ''수용기'와 같다.
예나 지금이나 코딩은 참 재미있다. 재미의 이유는 논리의 세계고, 입력과 출력이 1대 1로 딱딱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코딩의 세계는 확실성의 세계다. 현실의 세계는 불확실성의 세계다. 한 세계가 싫어 다른 세계로 떠나는 사람이 아니라, 두 세계를 동시에 오가며 확실성의 세계와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똑같이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