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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옹책방 Oct 23. 2022

프롤로그

왜 일인가?

나는 문지기였다.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에서 문을 지키는 일을 맡았다. 내가 다니는 회사에 들어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정문 입구에서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고 회사 안으로 들일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일을 했다. 평소에는 출입문을 단단히 막고 있다가 괜찮은 사람이 보이면 문을 열어 회사 안으로 들였다. 그렇게 회사 안으로 들여 보낸 사람은 한 해에 1,000명 전후였다.


입사했을 때 회사의 이름은 LG LCD라 불렀다. 그 해 여름, 회사 이름이 LG.Philips LCD로 바뀌었다. 새로운 회사의 탄생을 축하한다며 큰 행사가 열렸다. 한국 대표 아이돌이었던 H.O.T가 와서 축하 공연도 했었다. 사람들이 인산인해처럼 몰려왔다. 그날은 문지기 일을 멈추고 H.O.T를 보려고 회사 바깥에 끝없이 늘어선 입장객들의 줄을 점검하며 바깥 상황을 무전으로 행사장에 전하는 일을 했다. 전후무후한 행사는 무사히 잘 끝났고, 몇 년 뒤 회사 이름은 LG 디스플레이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회사 문지기로 내가 일하던 부서의 이름을 인재개발팀이라고 불렀다. 내가 입사한 1999년은 한국의 LCD산업이 기지개를 펴던 때였다. 삼성과 LG가 서로 세계 1위를 차지하겠다고 경쟁적으로 공장을 증설하며 인원을 엄청나게 늘리기 시작하던 때였다. 일년 내내 1~2만 명의 지원자를 서류로 만났고, 매년 2~3천 명을 면접봤다. 한국에서 짧은 기간 동안 가장 많은 사람을 뽑기로 손꼽히는 기업이었다. 입사할 때는 2000여명이었는데 몇 년 뒤 2만 5천명의 기업이 되었다.


회사에 들어 오려고 몰려 온 사람들 중에서 회사에 들일 사람을 가려내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나는 문지기 역할을 충실히 했다. 회사에 들어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보내온 그들의 정보가 가득 담긴 서류를 먼저 검토했다. 그때는 우편 접수를 받았다. 적게는 4장, 많게는 10장이 넘는 입사 서류를 검토하기 위해 종이를 넘기다 보면 손가락이 아린다. 손가락도 보호하고 서류도 잘 넘기기 위해서 골무를 끼고 서류 전형을 했다. 지원자들은 정말 다양했다. 기재된 내용도 물론이거니와 지원서에 담긴 마음도 제각각이었다. 인생을 바친 듯한 정성에 숙연해지는 지원서도 있고, 정성은커녕 우리를 농락하려는 듯한 무성의에 서류 봉투를 뜯자마자 불쾌해지는 지원서도 있었다.


문지기 업무의 시작은 지원자들이 보내온 서류를 보고 직접 만나볼 가치가 있는 사람과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을 구분하는 일이다. 면접 대상자를 추려내는 일 말이다. 판단의 기준은 일을 잘할 것 같은 사람인가? 아닌가?다. 일을 잘한다는 것은 행복한 삶이란 개념과 비슷하다. 간단한 것 같지만, 무척이나 복잡한 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펙이라 불리는 전공, 성적, 자격증 등의 객관적 기준으로만 판단하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지원자 한 명 한 명이 수학 문제라고 치면, 그들이 제공한 그들 자신에 대한 여러 정보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일을 잘할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한다. 지원자가 제공한 데이터를 기업의 입장에서 재구성하며 해석해야 한다. 수학 문제처럼 정해진 답은 없다. 어떤 관점, 어떤 기준으로 보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그래서 어렵다. 서류전형에서도 어렵고, 면접 전형에서도 어렵다. 처음에는 어렵지만 경험이 쌓이면 쉬워진다. 문지기 초짜였던 처음에는 입사서류를 아무리 봐도 합격으로 분류해야 할 지, 불합격으로 분류해야 할 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면접을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초보 면접관 시절에는 면접이 끝난 뒤에도 합불 판단을 못해서 서류를 뒤적이며 머뭇거리고 있는데 다음 조 면접자들이 들어와버려 맨붕에 빠진 적도 있었다.


뭐든 경험이 쌓이면 익숙해진다. 채용이라는 수학 문제를 푸는 마스터 공식을 터득한 것 같았다. 어리숙한 초보 문지기였던 나는 얼마 뒤 빠르게 문지기 업무를 수행했다. 마음만 먹으면 자소서 검토도 4초면 충분했다. 면접을 볼 때도 면접실에 들어오는 순간 판단할 수 있었다. 아무리 늦어도 5명의 지원자들이 한꺼번에 들어와 자리에 앉을 때나, 자기 소개가 끝날 무렵이면 대충 판단이 되었다. 나머지 면접 시간은 나의 판단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한 사람도 같은 사람이 없는 다양한 사람들이 춤추는 세계에서 모든 정보를 종합적으로 판단해 대단한 속도로 결론을 도출하는 감각이 생긴 것이다. 다른 인사 업무까지 하면서 매년 1~2만 장의 지원서, 1~2천 명을 면접자들을 만나다 보니 문지기 일의 속도와 효율성은 점점 늘어났다. 대부분이 일이 그렇지만 특히 채용 업무는 양궁과 비슷하다. 정해진 시간에 얼마나 정확하게 과녁에 명중시키는에 관한 문제다.


퇴직 후에는 문지기 일을 하면서 익힌 나의 감각을 팔아 먹었다. 기업이 사람을 뽑을 때 어떤 기준으로 어떤 정보를 어떻게 판단하고 해석하며 사람을 선택하는지에 대해 말했다. 취업을 준비하는 대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고 모의 면접을 하고 컨설팅을 했다. 기업에서 질리도록 사람을 뽑고, 부서배치를 하고, 어떻게 일하는지 모니터링했고, 퇴직면담까지 일일이 했던 내가 취업준비생들에게 자기소개서를 어떻게 쓰고 면접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말하는 건 땅집고 헤엄치는 일보다 쉬웠다. 컨설팅을 받는 사람들 대부분 목표를 이루었고, 나를 찾는 사람들이 점점 많았졌다. 한 때는 한 달에 10여일 일하고 천 만원 넘는 돈을 벌기도 했지만 그런 일에 조금씩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오로지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순진한 생각처럼 오로지 취업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쉽게 동의할 수 없었던 탓이다. 대학을 가는 것이 끝이 아닌 것처럼, 100억을 모아도 삶의 문제는 여전하다. 진짜 문제는 취업 이후부터 시작된다. 나역시 그랬다. 타인의 일을 갖게 도와주는 일을 하는 나였지만 정작 나는 일의 의미를 찾기 힘들었다.


기업이 주는 월급의 댓가는 일이다. 10명의 지원자 중 한 명을 채용한다면 기업은 그 중 가장 일을 잘할 것 같은 지원자를 뽑는다. 보여줘야 할 것은 단 하나다. 자신이 일을 잘할 수 있다는 능력이 있다는 것, 즉 직무 역량이다. 신입이든 경력이든 마찬가지다. 지난 20년 동안 일에 대해 말해 왔다. 취업을 원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원하는 일이 어떤 것이며, 어떤 역량이 필요한 지, 어떻게 접근하고 무엇을 말해야 자신의 일을 가질 수 있는지를 말해왔다. 이 일을 처음 시작한 날부터 지금까지 가장 강조하며 일관되게 말해 온 것은 일을 잘할 수 있는 능력이다. 사람들에게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이 나의 일이었고, 나는 일에 대해 누구보다 잘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 믿었다. 하지만 2019년 가을부터 이런 나의 오만했던 믿음은 산산조각 나버렸다. '도대체 일은 무엇인가?'라는 당연하고 사소한 질문 하나 때문이었다.  


입사지원이란 나와 기업, 나와 일(직무)를 연결해 나를 말하는 과정이다. 삶이란 나와 세상을 연결해 나를 표현하는 과정이다. 내가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면 세상에게도, 기업에게도, 사람에게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말하기 힘들다. 심지어 가장 친한 친구에게조차 내 말을 듣고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되묻는다. 나를 모르면 혼자만 보는 몇 줄의 일기도 정리가 되지 않고 빙빙 돈다. 나 스스로 정리되지 않는 생각을 타인에게 설득력있게 말하는 건 불가능하다. 뭔가를 제대로 안다는 건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공부가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우정이 무엇인지, 국가가 무엇인지, 정치가 무엇인지, 돈이 무엇인지 그 본질을 안다는 건 삶의 나침반을 볼 줄 안다는 뜻이다. 몰랐던 것에 대한 통찰적 앎은 더 나은 삶을 그리는 새롭고 유용한 좋은 도구가 된다.


일을 가지려는 사람이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먼저 일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일없는 인생이란 바람빠진 풍선같다. 매일 아침 집을 나가 20년 넘게 공부하는 이유는 일을 가지기 위해서다. 일을 가지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 일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 일을 하는 시간, 자신이 한 일을 돌아보며 또 무슨 일을 할 지 생각하는 시간을 빼면 삶에서 무엇이 남을까? 삶을 만드는 건 일이다. 일은 곧 삶이다. 일이 무엇인지, 왜 일을 하는지 스스로 모르면 입사지원은커녕 어떤 일을 하더라도 좌절하고 헤맬 가능성이 높다. 내가 하는 일이지만 사실은 남의 일이고, 내가 사는 삶이지만 사실은 남의 삶이라는 사실 때문에 일과 삶으로부터 도망쳐보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여전히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삶에서 일은 삶 자체 만큼이나 중요하다. 일로 자신만의 삶을 만들어가려는 취업준비생들에게 일을 이야기 해왔던 내가 오랜 세월 동안 ‘일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조차 스스로에게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수십년 생명공학을 가르친 교수에게 생명이 뭐냐고 묻자 한 마디도 대답 못하는 상황 같았다. 정신 차리고 둘러보니 나뿐 아니라 대부분 나와 같았다.


부러워하는 억대 연봉의 멋진 직업을 가진 사람도, 100억 건물을 가진 사람도 자신 스스로 일과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하면 길을 잃고 방황한다. 방황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삶은 힘들어진다. 이유는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네비게이션이다. 일의 이유는 삶의 이유로 이어진다. 이유를 아는 사람의 삶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낫다. 이유를 알면 삶의 질문에 더 적극적으로 대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질문에 대해 행동으로 대답하는 것, 그것이 일이다. 더 나은 인생을 위한 일의 이유와 삶의 이유를 찾으려면 먼저 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일은 삶의 시작과 끝이기 때문이다. 절실하게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 직업으로서의 일이든 할 일 없는 일요일 오후에 ‘오늘 뭐할까?’며 무료함을 채우는 일이든 마찬가지다. 일이란 삶의 공간을 채우는 공기다.


부끄럽고 설레는 마음으로 뒤늦게 일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답을 찾아 헤맸다. 사람들에게 직무 역량을 말해왔던 16년간의 시간을 돌아보며 일에 대한 오랜 경험과 생각을 재구성했다. 1년쯤 지나자 일이 무엇인지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2년이 지나자 컨설팅과 강의를 통해 학생과 교사들에게 일이 무엇인지를 조금씩 말하기 시작했다. 기대보다 반응이 좋았다. 도움이 된다는 피드백에 힘이 났다. 일에 대한 나의 이야기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될 것 같았다. 처음부터 일 이야기를 했어야 했다. 수 만명의 학생들에게 일이 무엇인지 묻지도 말해주지도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취업과 진로, 직무 역량을 말했던 부끄러운 과거를 딛고 새로 시작해야겠다 결심했다.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며 그제야 삶이 무엇이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닫는다면 너무 늦다. 요양원을 알아보는 시기가 되어서야 일이 무엇인지 깨닫고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아는 것도 너무 늦다. 일하는 사람이 되고 나서 일이 무엇인지 관심을 가지는 것도 늦다. 일이 무엇인지 빨리 알수록 더 나은 삶을 살 가능성이 높다. 관심을 가진다고 제대로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다. 긁어온 글로 재구성한 블로그 글같은 소리로 일을 어디선가 들어본 말뿐이다.      


일이 무엇인지 자신의 생각과 언어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중요하다. 학생, 취업준비생, 직장인의 더 나은 삶에 도움되기 때문이다. 공부하는 학생들은 일의 이해를 통해 자신만의 진로를 찾아갈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다. 다양한 직무와 각자의 능력을 연결지으며 자기소개서를 쓰고, 면접을 볼 때 결정적 도움을 주는 건 일의 이해다.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면 진짜 일잘러가 될 수 있다. 진짜 일잘러란 시키는 일, 해야 할 일을 매뉴얼대로 빠르고 정확하게 수행하는 사람이 아니다. AI 시대에 입력과 출력이 정해진 일은 더 이상 인간에게 요구되는 일이 아니다. 시키는 일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일답게 해야 일을 잘 하는 사람이다. 일답게 일하려면 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조직에서 요구하는 일이 아니라 조직에서도 미처 모르지만 필요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만이 일을 통해 삶을 개선시킬 수 있다. 일이 무엇인지 알아야 일을 정의하며 일을 다룰 수 있다. 삶을 개선시키는 것은 일이다. 일을 알아야 일을 통해 나은 삶을 만들어갈 수 있다.  


일을 이해한다는 것은 삶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 어떤 누구의 삶에 대해서도 함부로 말할  없듯 어떤 일에 대해서도 가볍게 입을 놀릴  없다. 삶이 그러하듯 일에 대한 나의 주관적 생각과 해석이 저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의미있게 다가갈런지 모르겠다. 다만  권의 책으로 인해 일은 어떠해야 하는지 묻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더없는 기쁨이다. 거미줄인지 동아줄인지도 모르고 일에 대한 생각의 끈을 놓지 않은 오랜 이유가 있다. 가슴 깊이 간직하며 묵혔던 이야기 때문이다. 24  대학을 졸업하고 신입사원으로 출근하던 20대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내가 지금처럼 일에 대한 생각을 명확히 갖추고 있었다면 삶은 많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28 청년이었던 과거의 나와 같은 이들에게  이야기가  닿기를 바란다. 일을 가지기 위해 고민하든 일을 떠나기 위해 고민하든 일과 삶을 생각하는 마음과 만나면 좋겠다. 나의 이야기와 그들의 마음이 만나 상황과 조건에 상관없이 자신만의 일을 꿈꾸고, 어떤 일을 하든 그 일을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되길 바란다. 무엇보다 직업과 직책에 상관없이 당당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그리하여 각자의 고단한 일상 속에 몰랐던 삶의 이유 돋아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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