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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by 피라

학창 시절, 수학을 지독히도 못했다. 중고등학교 때 가장 많이 공부한 과목이 수학이다. 그럼에도 성적이 가장 낮았다. 학력고사 55점 만점에 10점을 받았다. 그럼에도 수학을 좋아했다.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과목 중에 주관적 해석이 들어가지 않은 과목, 정보가 왜곡되지 않은 정보가 담긴 과목이어서다. 개념적으로는 수학을 좋아했지만, 성적을 생각하면 수학이 답답했다. 재수까지 7년 수학 공부의 결말은, '나는 수학을 못한다.' '나는 가능한한 숫자와 거리를 둔 일을 해야 한다' 였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숫자를 좋아하셨다. 아버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숫자로 이해했다. 예컨대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몇 개를 터널을 지나는지 메모를 했다. 각 터널을 지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를 메모했다. 걸을 때도 계단을 횡단보도를 몇 개 만나는지, 계단을 몇 개 만나는지, 각 계단의 숫자는 몇 개인지를 메모했다. 그리고는 내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곤 했다. "KTX를 타고 부산에서 서울역까지 갈 때 터널을 몇 개 지나는지 알아?" "터널을 지나는 시간은 총 얼마인지 알려 줄까?" "남포동 지하철 역에서 용두산 공원 이순신 동상까지 갈 때 계단이 몇 개 있는지 알아?"



최근 들어 수학에 관심이 많이 간다. 수학 공부를 다시 하고 싶어진다. 땅을 측량하는 것이 기하학의 유래라는 말, 현실과 아무 상관 없이 수학적 추론만으로 얻어낸 결론이 다시 현실에 정확히 적용된다는 말, 수학은 세상을 패턴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라는 말 등이 관심의 불을 붙게 만든다. 내가 수학을 못한 이유는 수학이 무엇인지 개념이 잡히지 않은 탓이었다. 학창 시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유클리드의 '원론'을 읽고 싶어서 책을 뒤적이다 청소년을 위한 유클리드 기하학이란 책을 살펴 보았다. 첫 시작은 '기하학은 도형 및 공간의 성질에 대하여 연구하는 수학의 한 부문'이라고 되어 있다. 이 부분을 읽고 오래 동안 내가 수학이 어렵고 싫어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어린 시절부터 내가 궁금했던 것은 도형이 무엇인지, 공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함수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데 공식만 외워야 할 뿐 아무도 함수의 개념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다.



배움이란 흐름이다. 배움이란 A에서 B로 이동하고 B에서 C로 이동하는 과정이다. 배움은 단계가 있다. 단계를 건너뛰면 통찰이 있다 말한다. 나처럼 수학적 통찰이 없는 사람은 처음부터 차근차근 단계를 거쳐야 한다. 예컨대 2022년 서울 강남의 아파트 가격과 고대 이집트 인들의 경제관념에 대한 비교 설명이 1단계, 나일강 유역 범람 때문에 그때그때 토지를 정확히 측정할 필요가 2단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일했던 유클리드가 왜 원론이라는 책을 썼는지가 3단계, 역사를 통해 기하학이 어떻게 현실 세계를 바꿔왔는지 설명하는 4단계, 이런 일련의 맥락을 담고 있는 상징적 기호를 '도형'이라 부른다는 걸 설명하는 5단계, 그 다음은 교과서에 나오는 수학의 개념을 설명하는 6단계다.



수학 머리가 타고난 사람들은 바로 6단계부터 들어가도 된다. 온전히 이해되지 않으면 앞으로 나갈 수 없는 나같은 사람은 앞선 5단계의 이해 없이는 죽었다 깨어나도 교과서의 수학을 이해할 수 없다. 배움이라는 흐름에서 중요한 것은 B나 C가 아니라, A다. A를 무시하고 B나 C를 가르치면 어쩔 수 없이 주입식이 된다. 주입식 교육의 생존자로 살다 뒤늦게라도 수학의 재미를 알게 된 것 같아 다행이다. 그렇다고 수학 문제를 본격적으로 풀기엔 늦었다. 지금 아는 걸 15살 쯤에 알았더라면 나는 수학교육과를 갔을지도 모르겠다. 단지 수학 성적이 낮다는 이유만으로 문과를 선택하고 갈 곳이 마땅치 않다는 이유만으로 상경대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학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수학을 포기하는 나같은 학생이 앞으로는 없었으면 좋겠다.


수학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게 되어서인지, 갱년기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수학의 세계를 알아갈 생각을 하면 설렌다. 수학은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도구라는 걸 다양한 학생들에게 맞춰 친절하고 쉽게 원리를 설명해주는 것, 그런 수학적 지식을 삶과 세상에 이롭도록 어떻게 쓰일 것인지를 알게 해 주는 것이 학교의 역할이다. 삶을 갈아 넣으며 공부를 하며 '도대체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라는 기본 질문에 일단 대학을 가고 나서 생각해보라는 무책임한 대답을 하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 "선생님 수학 공부를 왜 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에 가슴 설레며 몇 권의 책을 쓸만큼 열정적 대답을 해주는 교사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과도한 행정업무라는 교사의 짐을 들어만 주면 그렇게 될까? 해야 할 일인데 하지 못하고 미루는 건 시간이 없어 설거지도 못하고 운동도 못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설거지를 하면서 스쿼트를 하는 것이 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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