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공간이 특별한 곳으로 기억되는 건 삶에서 특별한 일이다. 오늘 카톡으로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이냐라는 문자를 받았다. ‘was’라고 대답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왔다. 들어보니 10년 전에 내가 운영하던 작은 게스트하우스를 찾은 손님이었다. 영어강사를 하고 있던 20대 캐나다인이었고, 클래식 기타를 가지고 여행을 와서는 아침에 멋진 기타 연주를 해주었던 손님이었다.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할 때 단골 손님들이 제법 있었다.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이었다. 조용한 공간에서 뭔가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사람,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그때 인연으로 아직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몇 명 있다. 게스트하우스를 더 이상 운영하지 않는다고 하니 너무나 아쉽다고 한다. 부산에 오면 차나 한 잔 하자고 하니 내가 열었던 게스트하우스에 머물 수 없기 때문에 부산에 오지 않을 거라 한다. 연락 주고받으며 다음에 만나 얘기를 나누자 했다.
부산이 목적이 아니라, 게스트하우스가 목적인 분들이 많았다. 단골 손님이 특히 그랬다.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단지 느낌이 좋았던 그 공간에 머무는 것이 목적인 여행자들이었다. 그래서 자부심을 느꼈다. 만실은 10명이었지만, 만실을 채우기 싫어서 아무리 성수기에도 4, 5명 정도까지만 받으려고 노력했다. 게스트가 많아질수록 공용공간의 쾌적함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게스트하우스의 운영의 목적은 단 하나, 게스트가 와서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청소, 베딩, 조식, 정원 관리 등 마당에 떨어진 낙엽 하나까지 관리할 정도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오픈을 하고 3년 정도는 예민한 천성을 발휘해 사소한 것들까지 정말 최선을 다했다. 완전연소로 재가 되었기 때문에 게스트하우스를 접은 것에 대해 한 치의 아쉬움도 없다.
가끔 오늘 같은 경험을 하면 마음이 살짝 아려온다. 좋은 곳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공간을 더 이상 제공하지 못함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다. 내 친구가 그랬다. 내겐 게스트하우스가 천직이라고. 나도 한 때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힘들다. 직업병 때문에 팔꿈치, 팔목, 어깨, 허리, 무릎이 상했다.
내가 만든 공간이 누군가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다는 건 그만큼 내 인생이 의미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공간 뿐이랴. 말, 글, 행동…. 내가 짓는 모든 것들도 그러할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면 삶이 무섭다가도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