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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무 김치

by 피라


여태 먹었던 김치류 중에 가장 맛있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20년 전 그 맛을 아직 잊지 못한다.


퇴직 후 이듬해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철학 공부에 남은 인생을 전부 바치기로 작정했다. 유학도 진지하게 생각했지만, 나의 글을 본 국내 대학의 한 교수가 자기 밑에서 공부하라고 해서 망설이지 않고 결정했다.


정독실이라고 불리는 공용 공부 공간도 하나 얻고, 대학 개구멍까지 걸어서 1분 거리의 원룸에 살았다. 30대 중반에 퇴직해서 살 길은 오로지 공부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나처럼 절실한 같은 과 박사과정 대학원생과 친해졌다. 서로 생각과 말이 통했고 함께 열심히 공부하자 다짐하곤 했다. 대학원 선배이기도 하니 여러모로 많이 배웠다.


어느 날 아침, 반지하 5평 원룸의 천장 아래 쪽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길가에서 무릎 정도 높이에 창문이었고, 문을 열면 가로 40센티, 세로 20센티 정도의 공간이 열렸다. 유리 창문 너머로 발 그림자를 보며 창문을 여니, 그 친한 대학원 박사 과정 친구가 땅에 엎드리듯 얼굴을 내밀었다. 좁은 창문에 가득 찬 웃는 얼굴은 환하게 빛났다.


"저희 어머니가 열무 김치를 정말 잘 담그는데, 이번 거는 더 잘 되었습니다. 맛 좀 보시라고 가져왔습니다." 라며 창문으로 한 뼘 크기 락앤락 김치통을 건네 주고 바쁘게 가던 길을 갔다.


그 날 아침은 그 열무 김치로 밥을 먹었다. 정말 맛있었다. 적당히 익었고, 모든 맛이 조화로웠다.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우리 어머니의 열무 김치를 나눠 먹고 힘내서 열심히 함께 공부하자라는 마음이 담긴 그 열무 김치의 맛은 신비의 묘약처럼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그 맛을 아직 잊지 못한다. 그 날 이후 열무 김치는 나의 소울 푸드가 되었다.


세월이 흘렀다. 동학(同學)의 마음을 담아 어머니의 열무 김치를 건네 주었던 그 분과 어제 통화했다. 철학서 번역 작업을 하고 있는데, 너무너무 재미 있어 밤을 새는 루틴으로 공부하고 있단다. 철학교실 유튜브도 운영하는데, 구독자가 만 명이 넘는다. 국내 최고의 강연플랫폼에서도 귀하게 모시는 분이다. 최근에는 기업 CEO들의 강연 요청이 들어온다. 철학 분야에서 국내에서 강의를 가장 잘하는 몇 명에 속한다 본다. 그래서 기분이 좋다. 무엇보다 오래전부터 한결같이 끊임없는 질문을 통한 생활 철학을 실천하고 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함께 프로필 사진을 찍으러 가기로 했다. 나의 프로필 사진은 10년도 넘은 것이라 딴 사람이 되어 쓸 수가 없다. 이번 주 금요일에 찍기로 했다. 앞으로 1년 주기로 함께 프로필 사진을 찍어야겠다. 김치가 익어가듯 프로필 사진도 같이 익어가리라. 20년 전 그 열무 김치의 슴슴한 휴머니즘의 맛도 사진에 담아주면 좋겠다. 그런 사진사를 만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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