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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달집

by 피라


전화기에 지워야 할 번호가 수백 개 있다.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할 때 예약했던 사람들의 전화번호다. 그들의 전화번호를 저장했던 이유는 두 가지다. 예약한 손님이 게스트하우스를 찾아 올 때 대부분 근처에 와서 전화를 하는데(찾기 힘든 곳이라..) 그때 "누구세요?"의 느낌으로 받으면 속상할 수 있다.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의 느낌으로 전화를 받으려면 번호를 저장해 놓아야 한다. 체크 아웃 후에도 전화번호를 지우지 않은 이유는 재방문 때문이다. 운영했던 게스트하우스는 재방문율이 높아서 다음에 또 찾아 왔을 때 알아보지 못하면 섭섭해 할까봐서다.


그럼에도 어떤 손님의 번호는 저장했고, 어떤 손님은 저장하지 않았다. 전화번호는 대부분 'G20140510'처럼 방문한 날짜로 저장되어 있다. 여러 번 방문한 단골 손님은 이름과 근래에 바꾼 직업, 특이 사항 등 메모되어 있다. 다시 만났을 때 지난 번에 대화 내용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전화기에 남은 번호는 대략 4~5백개는 될 것 같다. 한국 사람만 그렇다. 에어비엔비 등을 통해 연락이 가능한 외국인까지 합하면 남아 있는 기록이 천 명에 육박할지도 모르겠다. 먼 곳에서 재방문한 외국인들도 몇 명 기억난다.


한 때 내 삶을 쏟아부어 가꾸었던 자부심 넘치던 공간이 폐허가 된 지 5년이 되었다. 한 때 분신이었던 사물의 붕괴가 정신에 미치는 영향이 있다. 특히 의지와 상관없이 붕괴된 것이면 더더욱 그렇다. 모든 것은 시작, 중간, 끝이 있다. 그 동안 끝내지 못했다. 이제 끝낼 때가 될 것 같다. 일단 전화번호부터 지워야겠다. 그 동안 지우지 않은 이유는 관심을 가지지 못한 탓이 99%, 알 수 없는 아쉬움 1%였던 것 같다. 전화번호를 그냥 지우려니 망설여진다.


문자라도 하나 보내고 싶다. "잘 지내시나요? 그때 찾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 달집은 닫습니다. 잘 지내세요."라는 말 정도는 하고 끝내야 사람된 도리 같다. 그리고 봄이 오면 주말 마다 폐허 속으로 들어가 조금씩 집을 정리해야겠다. 정글이 된 정원을 손보고, 먼지 가득한 집을 닦아내고, 물건을 버리고 정리해야겠다. 옥상 방수도 하고 혹한에 터져버린 보일러도 고쳐봐야겠다. 몸이 힘들어도 그렇게 해야겠다. 죽은 자를 정성껏 염하듯, 폐허가 된 집을 그렇게 보내줘야겠다.



https://blog.naver.com/dalzib


p.s : 닫는다는 포스팅이 2018년 겨울인데, 왜 2019년 여름까지라 적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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