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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필 Mar 31. 2024

게스트하우스

90년대 말, 첫 배낭여행을 통해 ‘게스트하우스’라는 곳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이집트, 이스라엘, 그리스, 불가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체코, 독일, 프랑스, 영국의 각양각생의 게스트하우스와 만났다. 게스트하우스의 매력은 단연코 낯선 이들과 나누는 진솔한 이야기였다. 세계 각지의 여행자들이 우연히 만나 여행 정보를 주고받고, 서로의 여행과 인생 이야기를 나누는 개성 넘치는 성장 플랫폼이 게스트하우스였다.


여행을 좋아하게 된 건 게스트하우스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번 여행을 떠날 때마다 두 달 가량 정처없이 떠돌았다. 네팔, 인도,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 미국, 멕시코, 캐나다, 호주, 인도네시아 등을 떠돌며 다양한 게스트하우스와 만났다.


2012년 가을, 경험하고 상상한 모든 게스트하우스를 편집해 최대 12명까지 묵을 수 있는 작은 게스트하우스를 구상했다. 게스트와 호스트가 이야기를 나누고, 게스트와 게스트들이 의미 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을 꿈꿨다. 술없이도 서로의 진솔한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는 비밀의 아지트를 지향했다. 게스트하우스의 이름을 ‘달’이라고 지은 이유는 지구에서 달을 볼 수 있는 이유는 태양 때문인 것처럼, 타자를 통해 자기를 발견하는 곳이길 바랬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러고 싶었다.


처음 몇 년은 지구 여러 곳에서 온 게스트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게스트하우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말을 걸고 이야기를 나눈 적도 많았다. 3년쯤 지나자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아무 말 없이 혼자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사람들도 있을 거야, 아니 그런 사람들이 내 생각보다 훨씬 많을지도 몰라.’ 그 뒤부터는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게스트가 먼저 이야기 보따리를 꺼내지 않으면 내가 먼저 말하는 일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게 배려라고 생각했다. 이런 저런 핑계를 통해 항상 먼저 말을 걸던 오지랍 넓은 호스트는 왠만하면 먼저 다가가지 않는 내성적인 호스트가 되어갔다.


꼭 소리나는 말을 서로 오래 주고받아야 교감하는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와 의미있는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전에 내면의 자신과 깊고 넓은 대화를 많이 했다는 걸 의미한다. 타자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과 대화하는 법을 배우고,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타자와 대화하는 법을 배우는 법이다. 여행과 공부는 타인의 삶을 통해 내 삶을 배우는 과정이다. 일은 내가 배운 것을 실행하며 시행착오를 통해 점점 더 배우는 과정이다.


포스트잇 이야기를 하려다 별 거창한 잡소리를 한다.

이야기를 많이 주고 받은 게스트도, 침묵으로 일관한 게스트도 체크아웃 할 때 저마다의 사연과 후기를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남기고 갔다.

달집을 찾은 세계 여러 곳 여행자들이 포스트잇을 붙여 놓은 저 공간을 어떻게 할까 고민고민했다. 독립 서점의 간판을 달고 아이들 인터뷰 클래스를 열고 여러 일들을 하는 공간으로 꾸미려면 게스트들이 만든 저 공간은 뭔가 뜬금없다.


그냥 그대로 나둬야겠다. 역사를 지우지 말아야겠다. 더 세월이 흐르면 집이 허물어지지 않게 지탱하는 대들보에 적힌 상량문처럼 여겨질지 모르겠다. 내 삶 반대편에 저문 태양빛으로 달이 은은하게 빛나듯 이 공간을 밝히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담긴 바로 저 포스트잇들일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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