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들이 버려야 할 것 중 하나는 조건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다. ‘지나친’이라는 형용사를 빼는 것이 더 솔직한 표현이다. 하지만 나는 지나친이라는 단어를 넣었다. 이유는 명백하다. 단정, 독선, 오만, 편협하게 보일까라는 우려 때문이다. 눈치를 보는 사람의 글은 대체로 별 볼일 없다. 고쳐야 할 습관이다. 다시 좋은 문장으로 수정하면 이렇다. “한국인의 문제는 조건에 대한 집착이다.” 좀 내 생각에 다가간 표현이다. 한국 사람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한국 사람들이 더 심하다는 뜻이다.
20대 말쯤, 애인 없는 친구가 있었다. 누군가 사귀라고 하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었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아서….” 준비, 다른 말을 하면 조건을 갖춘다는 뜻이다. 자질에 관한 마음의 준비든 경제적 조건에 관한 물질적 준비든 똑같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아직 조건을 갖추지 않았다는 뜻이다. 인간은 두 부류가 있다. 조건이 되지 않았다는 말만 반복하는 사람과 조건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전자는 한심하니 후자로부터 배워야 한다 생각했다. 살아보니 둘 다 문제다. 우린 무언가를 추구하며 노력하는 인간이 되려는 강박이 있다. 좋은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좋다. 따지고 보면 노력이라는 것은 대부분 ‘조건’에 대한 것이다. 공부를 좀 더 잘 하는 것, 좀 더 좋은 직업을 가지는 것, 통잔 잔고를 늘리는 것,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 넓고 쾌적한 집에서 사는 것, 멋진 자동차 운전석에 앉는 것. 쌍꺼풀을 만들고 코를 높이는 것, 머리 모양을 바꾸고 옷을 바꿔 입는 것. 팔로워 수를 더 늘리는 것. 나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 우리의 관심, 우리의 노력, 우리의 바람은 대부분 조건에 관한 것이다. 소위 말하는 좋은 조건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한 삶이며, 그런 조건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지 않거나, 좋은 조건을 갖추지 못한 인간은 이류, 삼류 인간으로 여기는 것이다. 자신이 그런 조건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인간으로 전락할 때 가장 참기 힘들다. 그럴 때 우리는 모멸감을 느낀다. 한국 사람이 느끼는 모멸감은 대부분 조건에 관한 것이다. “나를 무시해?” “내가 누군지 알아?”라는 말은 내가 어떤 조건을 갖춘 사람인지 알아?라는 의미가 담겼다. 내가 사는 집, 나의 직업, 내가 주로 만나는 사람들, 나의 차, 나의 재력. 조건은 곧 영향력이다. 내가 사는 세상은 필연과 우연의 결과인 특정 조건으로 구축된 세계다. 물론 건들면 폭발하는것 같은 성격적 조건도 포함한다.
비유를 들어보자. 비유가 아니라 예다. 멋진 카메라를 사면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생각, 피트니스 등록을 하면 운동을 열심히 할 것 같은 생각. 글쓰기 작업 환경을 바꾸면 글이 더 잘 쓰질 것 같은 마음. 조건은 환경이다. 작가라 불리거나 작가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에게 맞는 키보드, 컴퓨터, 종이, 펜, 작업 환경을 중요하게 여긴다. 자신의 일을 존중하는 마음도 담겼지만,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작업 루틴도 따지고 보면 조건에 대한 이야기다. 루틴을 지킬 수 없어 일을 제대로 못한다는 것도 조건을 탓하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닿으니 부끄럽다. 윈도우 환경이 구려서 맥으로 바꾼 것, 글자를 좀 더 선명하게 보기 위해 4K모니터로 바꾼 것, 클라우드 자동 저장 환경을 구축한 것, 옵시디언, 베어, 율리시즈, 스크리버너와 더 좋은 도구에 대한 관심, 검색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환경 구축, 좀 더 좋은 모니터로 바꾸고 싶은 마음, 고가 키보드를 3개나 구입하고도 더 좋은 키보드가 없나 관심 가지는 것. 이쯤 되면 글쓰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조건을 만들어가는 것이 목적 같다. 생산성의 본질은 조건이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 글쓰기 위한 더 좋은 조건에 대한 연구자일뿐이다. 젊은 시절 귀촌지를 알아볼때 만났던 시인들 같다. 그들은 허구헌날 만나 술을 마시며 시에 대해 서로 이야기했다. 시 한 줄 쓰지 않으면서. 그들은 자신이 시인이라 했다. 시를 더 잘 쓰기 위해 고민하는 시인. 하지만 정작 시를 쓰지 않는 사람들.
사람들과의 만남이 줄어든 건 그들의 이야기가 시시해서다. 대부분 조건에 대해 이야기한다. 삶은 생각이 아니라 행동에 관한 것이다. 그들의 행동들이 쌓여 결국 어디에 도달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드물다. 인생의 목적 말이다. 사람들은 목적 대신 조건에 대해 말한다. 집, 차, 운동, 돈, 여행, 주식, 옷, 음식, 외모, 그리고 공격과 혐오. 타인을 비난하는 것은 조건에 대한 것이다. 그들의 피부색, 골격 구조, 직업이라는 옷, 재력과 권력, 영향력이라는 조건에 따라 선망과 혐오를 결정한다. 타자가 갖춘 조건으로 대상을 판단하는 태도는 오롯이 자신을 향한다. 나의 조건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괴감, 자기혐오가 싹튼다. 분노, 우울증, 시들함이 삶을 물들인다.
조건은 인정으로 확장된다. 인정의 필연적 조건은 경쟁이다. 더 공부를 잘하면, 더 좋은 대학을 가면, 더 좋은 직업을 가지면 더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거라 믿는다. 좋은 대학이 좋은 직업의 필연적 원인이 아니고, 좋은 직업이 행복한 삶의 필연적 원인이 아님을 수많은 통계가 말해주고 있음에도 조건은 삶의 절대 척도로 업그레이드된다. 조건은 우리 삶의 시작과 끝이 되었다.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삶, 더 행복한 삶을 살 것인지 생각하며 더 나은 옷, 더 나은 관계, 더 나은 집, 더 나은 직업, 더 나은 성품, 더 나은 능력을 갖기 위해 더 나은 결정을 위해 에너지를 쓴다. 더 나은 조건을 갖추기 위한 과정이다. 우리는 그것을 삶이라 부른다. 조건을 위한 노력은 우리 삶의 전부다.
모니터 앞에 서서 자료를 모은다. 글쓰기 책을 읽는다. 아이디어를 메모한다. 이런 기획, 저런 기획 아이디어를 러프스케치한다. 목차를 잡는다. 내용을 구성한다. 무너뜨렸다 허물었다를 반복한다. 글쓰기 위한 준비다. 정작 글은 쓰지 않는다. 아직 준비가,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건을 더 갖추어야 한다. 글쓰기와 삶이 비슷하다. 삶을 살지 않는다. 삶을 위한 조건을 갖춘다. 그래서 사람들은 묻지도 말하지도 않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칫"하는 반응을 보인다. 대신 어떤 조건을 갖출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혹한다. 조건의 상징은 돈이다. 돈이 없어 못한다는 말은 조건 때문에 못한다는 말이다. 조건이 삶의 영토를 차지했다. 암세포처럼.
구독자와 팔로워 숫자는 조건이다. 내게 관심 가진 사람들을 늘리는 것은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구독자가 1억명이 되었다 생각해 보자. 그때 무엇을 하고 싶을까? 그때도 구독자를 더 늘리고 싶은지, 그들에게 지금과 다른 뭔가를 전하고 싶은지. 모든 조건을 갖추었을 때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정확히 알고 있다면 그 일을 지금 하는 것이 좋다. 그런 일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찾아나가야 한다. 지금 하는 일을 하면서. 조건보다는 삶의 목적을 생각하면서. 구독자를 늘리고, 자신만의 진로를 찾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비결은 조건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조건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것. 조건으로 대상을 해석하지 않는 것. 그것이 올해 목표다.
준비가 되면 결혼하겠다던 그 친구는 몇 년 뒤 결혼했다. 우리 친구들은 그 친구에게 "준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평생 준비해 봐라. 준비가 다 되는지...."라며 지속해서 놀렸다. 그런 말에 크게 깨달았거나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결혼한 것 같진 않다. 조건 같은 건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을 만난 탓일 거다. 조건을 행동의 전제로 여기는 태도는 하루라도 빨리 버리는 것이 좋다. 행동의 전제는 삶의 전제다. 조건이 삶을 지배하면 마음이 황무지가 된다. 그 친구에게 했던 말은 사실 나 자신에게 했던 말이었다. 얼마나 오랜 세월 뇌까렸는지, 나의 일부, 나 자체가 되었다. 조건이라는 껍질을 깰 때는 바로 이 순간이다. 황폐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조건 이전과 조건 이후를 생각해야 한다. 근사한 외출복이 없어도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