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살 아이가 방과후에 축구를 배우기로 했다. 축구화를 사야 한다. 축구화 대신 운동화를 신어도 별 문제 없다. 하지만 축구화를 사주지 않으면 부모 자격이 없다 여기는 시대다. 요즘 부모의 역할은 아이에게 더 나은 조건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부모는 교육보다 조건에 집중한다. 옛날에는 동네마다 신발 가게가 있었다. 요즘은 신발가게를 찾기 힘들다. 아울렛, 마트, 인터넷 쇼핑 등을 이용한다. 신발 가게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ABC마트 같은 모습으로 진화했고, 유명 브랜드는 백화점으로 들어갔다. 신발을 살 때는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아울렛에 가는 것이 편하다. 유명브랜드들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아이와 함께 어떤 축구화가 있는지 둘러 보았다. 아식스, 나이키, 아디다스, 아이는 아식스를 마음에 들어했다. 말로만 듣던 요넥스라는 브랜드에서 만든 신발도 보았다. 요넥스는 행사를 하고 있었다. 축구화를 사면 스텐리 텀블러를 주는 행사였다. 텀블러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아식스보다 가격도 쌌다. 나는 아이에게 요넥스 축구화를 사주기로 마음 먹었다. 그런데 아이가 싫다며 아식스 축구화를 신고 싶다며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나는 정색을 하고 아이에게 말한다. “정신 차려, 요넥스가 더 좋은 축구화야. 이게 15,000원 싸고 디자인도 예뻐. 이런 걸 가성비라고 하는 거야. 더구나 이걸 사면 엄마가 좋아하는 텀블러도 갖는 거야. 이런 걸 일석이조라고 하는 거야. 네가 아식스를 좋아하는 마음도 알겠지만, 세상은 함께 사는 거야. 다른 사람들 생각도 할 줄 알아야지. 더 왜 그렇게 이기적이니? 이제 그만 울어. 너 자꾸 우기면 일주일 동안 티비, 타블렛, 핸드폰 모두 금지야!“
결국 요넥스 축구화를 샀다. 그런데 신발을 신은 아이가 물집을 보여주며 발이 아프고 불편해서 못 신겠다고 말한다. 엄마는 아이에게 다그친다. “세상 살다보면 힘든 일도 있는 거야. 참고 견뎌야 할 때도 있어. 네가 이 신발을 신지 않으면 아까운 돈을 버리게 되는 거야. 참고 신어. 원래 새 신발은 그런거야, 굳은 살이 생기면 괜찮아져.”
100% 지어낸 이야기니까 이런 엄마가 실제로 있을 것 같지 않다. 요즘 요넥스라는 브랜드가 핫하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안세영 선수가 신은 신발이기 때문이다. 최근 청문회에 배드민턴 협회장이 나왔다. 안세영 선수의 발이 엉망이 되고 고통을 호소했지만 왜 요넥스 신발을 강제로 신게 했냐는 질문에 배드민턴 협회장은 계약서상 규정 때문이라고 했다. 계약이란 너도 좋고 나도 좋은 것이다. 상대에게만 좋고 나에게는 나쁘다면 좋은 계약이 아니다. 그런 계약은 법적으로도 문제가 생긴다. 그런데 계약 당사자들에게는 좋은데, 그런 계약으로 인해 연관된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본다면 역시 잘못된 계약이다. 이런 나쁜 계약 조항은 바꾸든지 법적 제재를 가해야 한다. 안세영 선수 신발 문제는 계약 당사자들에는 이익이 되지만, 가장 중요한 선수에게는 불이익이 가는 계약이었다.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신발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데, 협회장은 계약을 그렇게 했다며 무조건 신을 수밖에 없었다는 말만 반복했다. 무조건과 어쩔 수 없다는 말은 같은 말이다. 어쩔 수 없으니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무조건 신어야 하는 것이다. 대중은 자세한 내막도 진실도 모른다. 사진으로 보여준 안세영 선수의 참담한 물집은 어떤 신발을 신더라도 생기는 것이고, 단순히 안세영 선수가 다른 신발 브랜드를 좋아해서 벌어진 일일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건 심각한 문제다. 왜 선수는 자신이 선호하는 신발을 신지 못하는가? 아이가 신고 싶어하는 신발이 있는데, 왜 부모는 그 신발을 못 신게 하는가? 그런 부모가 있을리 만무하지만, 만약 있다면 대단히 큰 착각을 하고 있는 부모다. 신발은 아이를 위해 사주는 것이자, 부모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선수를 위한 신발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한 상식이다. 이런 당연한 일을 국회 청문회까지 하면서 따지고 있는 2024년 대한민국의 현실이 참담하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배드민턴 협회장이었다. “계약 규정이 그렇다”는 말만 끝없이 반복하는 협회장의 태도에 질린 사람들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더 이상 질문하는 것이 의미 없어 머리를 감싸쥐고 괴로워하는 국회의원도 있었다. 계약의 영향이 미치는 선수는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만의 목적만 생각한 계약의 최후는 우리가 아는 그대로다. 배드민턴 협회는 조롱거리가 되고, 요넥스 브랜드 이미지는 추락했다.
일하는 사람은 두 부류가 있다. 매뉴얼대로, 원칙대로, 규정대로, 관습대로, 시키는대로 일하는 사람이 있다. 배드민턴 협회장 같은 사람이다. 이렇게 일하면 편하다. 문제를 발견하고, 정의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시간과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된다. 일하면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는 모든 방법은 이미 정해져 있다. 배드민턴 협회의 경우는 계약과 관행이다. 이런 태도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다. “규정이 그렇다. 근거가 없다. 관행이 그렇다. 법도가 그렇다. 세상이 그렇다.” 배드민턴 협회는 규정이라는 단어를, 공무원들은 근거라는 단어를, 사조직에서는 관행이라는 단어를, 조선시대에는 법도라는 단어를, 일상에서는 세상이라는 단어로 대치될 뿐이다. 이미 정해진 대로 일하는 사람의 일자리는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매뉴얼대로 일하면 되는 직업은 사라진다. 메뉴 주문을 받고, 서빙을 하는 일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신하다가 최근 서빙로봇으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다. 제조업의 제조 현장도 스마트팩토리라 불리는 자동화가 되고 있다. 배드민턴 협회장의 얼굴에서 가까운 미래에 곧 사라질 직업들을 보았다. 오직 매뉴얼대로만 일하는 직업은 누구로나 대체가능하다. 누구로나 대체가능하다는 것은 곧 기계 혹은 인공지능이 하게 될 일이라는 뜻이다. 시키는대로 일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시킨다는 일이 반복되면 매뉴얼이 되고, 매뉴얼은 곧 알고리즘이 된다. 인간의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인간의 일이 아니라는 말의 뜻은 인간이 그 일을 할 수도 있지만, 인공지능과 경쟁해야 하는 일이라는 점이다. 인공지능과의 경쟁에서 인간은 이길 수 없다. 애초부터 승산이 없는 일에 매달리는 것은 비인간적 삶을 만든다. 매뉴얼대로만, 시키는대로만 일하는 태도는 자신 스스로를 일하는 도구로 만든다. 자존감, 인간성은 자신이 하는 일에 의해서 무너진다. 내가 살아왔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보다 정해진 일의 방식이 더 중요한 세계에서는 휴머니즘이 증발한다. 인간이 아니기에 인간으로 살 수 없다는 뜻이다. 안절부절 못하면서도 고집을 부리는 영상 속 불쌍한 인간. 배드민턴협회장은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의 사고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규정이 그렇다고, 계약이 그렇게 되어 있다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새로운 계약을 할 때도 생각을 할 줄 모른다. 왜냐하면 목적을 모르기 때문이다. 목적을 모르는 사람은 내용을 뜯어볼 수 없다. 내용의 잘못된 점, 불합리한 점, 고쳐야 할 점을 보지 못한다. 이들은 현장의 목소리를 무시한다. 실질보다 관념을 추종한다. 현실보다 이론을 따른다. 타자보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무엇보다 편하게 일하고 싶다. 가장 쉬운 해결책만 떠올린다. 규정, 근거, 관행, 법, 매뉴얼로만 일한다.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의 일의 세계에서는 진실된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는 없다. 내가 하는 일이지만, 나의 일과 나는 분리된다. 규정과 매뉴얼에 의해서 철저히 분리한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이렇게 탄생한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일하는 사람은 곧 일을 잃을 사람들이다. 일을 잃는다는 것은 삶의 토대가 무너진다는 뜻이다. 일과 삶의 나침반이자 안전판이라고 믿는 규정과 매뉴얼, 규칙과 법들이 우리 삶을 붕괴시킬 것이다. 나는 어제 청문회 영상을 통해 그렇게 붕괴되고 있는 한 사람을 보았다. 그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그가 나일지 모른다. 나의 미래가 그의 운명이 되지 않도록 인간답게 생각하고 인간답게 일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