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의 목적

산재

by 피라


한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여자와 나는 큰 테이블을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넓의 회의실에는 그녀와 나, 둘밖에 없었다. 중요한 일을 해야 하니 들어오지 말라 했다. 나는 여자에게 “아무리 그렇게 해도 소용없어요. 그러니 현명하게 생각하세요.”라고 말했다. 여자의 표정이 무너졌다. 자신의 뜻대로 하면 자신에게 해롭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신호다. 여자는 졌고 나는 이겼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나는 결정적 행동을 했다. 글자가 적힌 A4 크기 종이 한 장을 맞은 편 여자에게 권위 있게 스스륵 밀었다. 문서의 제목은 ‘퇴직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무 말 없이 플러스팬 한 자루를 퇴직원 옆에 놓았다. 꼼짝않던 여자는 펜을 들어 퇴직원을 작성하고 사인을 했다. 드디어 끝났다.


여자는 가난했다. 고등학교를 졸업 후 일하기 시작했다. 생산 현장이었다. 일하던 어느날 허리가 삐긋했다. 참고 일했지만 점점 고통이 커졌다. 눈덩이처럼 고통은 점점 커졌고 몸을 가누기 점점 힘들어졌다. 병원에 가니 디스크라고 했다. 그 몸으로 일할 수 없었던 여자는 휴직을 했다. 충분히 누워 있으면 괜찮아지기도 한다니 희망을 가졌다. 휴직 기간이 끝날때가 되었는데 낫지 않았다. 휴직을 연장했다. 그래도 나아지지 않았다. 여자는 앞으로 어떡해야 하나 고민했다. 휴직 연장을 회사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으니 산재처리라도 해야겠다 마음 먹었다.


그 상황에서 여자와 나는 인사팀 회의실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있었다. 그날 내 일의 목적은 여자가 산재신청을 못하게 하는 것, 스스로 퇴직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여자의 인생을 생각하는 척하며 부드러움과 친절함을 위장한 강압적 권위로 여자를 설득했다. 안타깝지만 큰 기업을 상대로 싸워봐야 개인만 손해를 보니, 그냥 실리를 챙기는 것이 좋겠다며 진정으로 그 여자를 생각하는 척했다. 그건 명백히 잘못된 일이었다. 나는 지시를 이행했을뿐이다.


지시를 이행했을뿐. 익숙한 말이다. 홀로코스트를 저지른 나치의 아이히만도 같은 말을 했다. 그는 재판정에서 “나는 단지 명령에 따랐을뿐”이라고 말했다. 한나 아렌트가 그 모습을 보고 악은 평범하다 말했다. 악은 거창하고 특별하지 않다. 잘못되었다 생각했지만 문제 제기를 하지 않고, 싸우지 않고, 거부하지 않고 그 일을 시키는대로 한 나. 내가 악이다. 25년 세월이 흘렀지만 어제 일같다. 그런 일들이 많았다. 시키는 것을 잘해 내는 것. 일은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잘못된 일이라 생각해도 그렇게 일할수밖에 없다 생각했다. 일은 그런 것, 삶은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그 여자는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하다. 기억을 되살리며 글을 쓰니 그 여자의 이름까지 떠오른다. 면접 때 만나 뽑았던 수천명의 이름들, 퇴직면담 때 만났던 수백명의 이름들. 그 중에서 그녀의 이름이 잠수함처럼 떠오른다. 털어 놓고 나니 이제야 숨을 쉬고 살 것 같다.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그건 나의 잘못이다. 아무리 지시를 받았더라도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살지 않길 바라며 기저귀를 갈아주고, 젖을 물리고, 밥을 해 먹이고, 다칠까 아플까 나를 돌보았을 것이다. 그렇게 키운 자식이 산업 재해로 몸을 다친 사람에게 회사 이미지 떨어지지 않게 조용히 퇴직하라며 서류를 내미는 사람이 되길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했던 일은 나를 사랑하고 돌봐주었던, 나를 믿어주고 응원했던, 나와 연결된 사람들에 대한 모욕이다. 내가 나를 모욕했다.


시간을 되돌려 그때로 돌아간다면. 말할 것이다. 설득할 것이다. 싸울 것이다. 행동할 것이다.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계엄령 때 용기있게 행동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한없이 부끄럽다.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는 것은 그 사람의 감정도, 생각도, 고민도 아니다. 그 사람의 표정도 말도 아니다. 그 사람의 행동이다. 나는 잘못된 일인줄 알면서도 잘못된 행동을 했다. 이 깨달음이 너무 늦지 않았길 바랄뿐이다.


권위 때문에, 나의 이익 때문에 잘못된 일인줄 알면서 무언가를 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길 바란다. 내 속의 그런 비굴함과 굴종의 유전자가 치유되길 바란다. 지시를 받고, 고민 끝의 결단으로 잘못된 일을 하지 않길 바란다. “어쩔 수 없었다”며 “지시에 따랐을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줄어들길 바란다. 어쩔 수 없었던 인생이었고, 그렇게 할수밖에 없는 인생이었다는 생각을 않길 바란다. 남은 인생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앞으로는 자주, 잘못된 것을 거부하며 살아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해석하고 판단하는 힘을 먼저 길러야겠다. 그런 현명한 판단을 위한 첫번째 전제 조건은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두 가지만 명심하면 좋겠다. 내 생각은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망설임과 의심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따르기.

잘못되었다 생각하는 것을 그냥 두지 말고 바로 잡기 위해 노력하는 문제 해결의 과정에서는 나의 해결 방법만이 옳다는 생각을 버리기.


두 가지만 명심하면 좋겠다. 내 생각은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망설임과 의심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따르기 않기.

잘못되었다 생각하는 것을 그냥 두지 말고 바로 잡기 위해 노력하는 문제 해결의 과정에서는 나의 해결 방법만이 옳다는 생각을 버리기.


하나는 내 생각대로 하는 일이며, 하나는 내 생각대로 하지 않는 것이다.

잘 산다는 것은 나와 나 아닌 것을 서로 잘 버무리는 일이다.

타인의 뜻이 아니라 나의 뜻에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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